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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6/3/20 종려 주일의 함성

관리자 2016.03.19 12:55 조회 수 :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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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태복음 21:6-9

     맞은편 마을에 갔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입성이 죽음의 행진이란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는 것과 십자가의 수난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전해져 오는 역사학자 죠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250여만 명이 운집해 있는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왕의 개선 행진, 그것은 확실히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은 같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골고다 사건까지 이어지는 영원히 합치될 수 없는 평행선 같았습니다.

1. 예루살렘 입성에 나귀가 선택되었습니다.
     나귀는 말에 비해 참으로 볼품없는 짐승입니다. 그 용모부터가 볼품이 없는 짐승입니다. 용맹함도 없고 빠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곱지 않습니다. 또 말처럼 기품도 없고, 코끼리처럼 위풍당당하지도 않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왕"이 탈만한 짐승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때까지 솔로몬 왕 이후로 나귀를 탄 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짐승을 "메시아의 예루살렘성 입성" 에 동원하셨습니다. 이러한 나귀의 이미지는 이사야 선지자가 53장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며, 멸시와 간고를 겪으시고 질고를 짊어지신 "메시야"의 이미지와 같았습니다.

     말이나 코끼리를 타지 아니하시고 나귀를 타신 것은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는 정복자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온유의 왕, 겸손의 왕, 저항하지 않는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볼품없는 나귀의 선택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의 속성이 무엇이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제자들이 끌고 온 예루살렘성 입성에 선택된 나귀는 아무도 타 보지 아니한 나귀였습니다(막11:2). 하나님의 법에 명시된 말씀을 보면, 제물로 드려지는 암 송아지는 멍에를 메지 않은 것이어야 했고(민19:2, 신21:3), 법궤를 실은 우마차도 다른 데 사용한 일이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삼상6:7).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의미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아니한 나귀를 타신 것은 예언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래 장자, 첫새끼, 첫열매 등은 하나님의 것이었으므로(출13:2, 23:19)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2. 제자들의 행동은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였습니다.
     새끼 나귀를 끌고 온 제자들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그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아 놓는 행위였습니다. 겉옷을 깔았다 하는 행위는 왕에게 하는 예우였습니다(왕하9:13). 그리고 이와 같은 행위가 담고 있는 의미는 환영과 복종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은 곧 메시아의 입성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의 왕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장차 예루살렘은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고, 이 시온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과 같이 만국에 흘러가게 될 것이라고(사2:3) 그들은 기대했습니다. 이러한 왕에게 그들은 최대의 경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실 길에 깔았습니다.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마카비가 예루살렘 성에 승리의 입성을 할 때에도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았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지켜보던 제자들의 생각속에는 어쩌면 "승리, 유대의 왕, 나라의 독립, 로마의 멸망과 왕국의 회복 그리고 장차 자신들이 앉을 자리" 같은 단어들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우로 예수님의 입성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군중들의 환호는 메시야 왕국의 성취가 보이는 듯 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앞뒤에서 따랐습니다. 군중들의 손에는 창검 대신에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왕과 종려나무 가지를 든 그의 백성들, 이것이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군마에 높이 오른 왕과 창검과 기치를 펄럭이며 위풍당당한 군대를 거느리고 입성하는 세상의 왕의 행렬과 대조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전자는 평화의 행렬이고, 후자는 전쟁의 행렬입니다. 전자는 생명의 행렬이지만 후자는 죽음의 행렬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9절) 백성들은 외치며 따랐습니다. "호산나"의 본 뜻은 "지금 구원하소서"인데 후대에는 "만세"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메시아 만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나라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군중들의 이와 같은 외침은 한마디로 메시아에 대한 감격의 칭호였습니다. "드디어 메시아가 오셨다" 저들은 그렇게 기대했을겁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는 환호성 속에는 위대하고 찬란했던 옛 왕국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반면에 길고 긴 고난의 역사도 저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역사의 환호이며 감격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종려 주일은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에 큰 소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군중들도 몰랐습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지만,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었고,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주님이 고난에 대한 예고의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애써 고난 자체를 부인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2000년전 오늘 예루살렘 성을 수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환영 속에 입성하셨습니다. 오늘도 같은 사건이 매해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당시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어떤 주님으로 환영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당시 군중들처럼 본질을 외면한 채 개인 이기를 채우기 위한 욕심의 눈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2000년 전 예루살렘 입성의 본질적 의미를 알지 못했던 제자들과 군중들처럼 우리도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할 겁니다.

     뜨거운 환영인파 속에 주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지만, 그 길은 결코 그 누구도 함께 갈 수 없었던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주님을 외롭게 하는 자가 바로 나와 너 우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나, 제자들은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골고다를 바라보고 계셨지만, 제자들은 권력의 자리를 탐욕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입성하시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시렵니까? 또 다른 종려 주일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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