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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6/4/24 나무에 걸맞는 열매

관리자 2016.04.23 17:10 조회 수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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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누가복음 6:43-45

    주님은 본문에서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신앙이 결코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신앙 상태가 어떠한지를 입증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1. 신앙은 일상 생활에서 판명납니다.
    종교적인 신실함은 많은 기도나 금식, 혹은 얼마나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사회 윤리적으로도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신실한 신앙인은 윤리적으로도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5:13)이요 "세상의 빛이라"(마5:14)고 말씀하심으로 성도들을 사회와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회윤리의 모본이요 봉사자로 규정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신실한 성도인가를 보고자 하실 때 그 사람의 말하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생활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삶에서 사회 도덕과 얼마나 잘 조화되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러한 사람의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리는 향내 나는 삶입니다.

2. 신앙은 희생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판명납니다.
    우리는 흔히 사회적인 막강한 권력이나 재물 등을 가졌으면서도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는 사람을 신실한 신앙인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외적인 신앙의 표면적인 활동이 그 사람이 신실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다 입증해 주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쉽게 보이는 대로 단정해서도 안됩니다. 신실한 신앙인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실제적인 어떤 희생이 요구될 때입니다.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세상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결단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기 위해 그러한 상황을 만드십니다.

    신실한 신앙인은 어떠한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드러날 정도로 화려하게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시1:3)듯이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할 때에 열매를 맺는 신앙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신앙은 환란이 닥칠 때 판명납니다.
    신앙 상태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때는 또한 환란이 닥치는 때입니다. 고통이 밀려오고 두려움이 닥칠 때입니다. 환경이 단지 우리가 "신앙인" 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위협하고 삶의 기반을 뒤흔들 때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정도가 드러납니다. 또한 환경이 우리를 신앙에서 멀어지게 유혹할 때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면 죽이지만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할 때입니다. 이때 흔들리지 않을 신앙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유혹과 협박에 초연하기란 몹시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리스도에게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엡3:17) 신실한 신앙인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예수님께 대한 확실한 신뢰 안에 거하기 때문에 결코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유혹을 못 이겨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입니다.

4. 신앙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판가름납니다.
    우리로 하여금 판단을 흐리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로 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빼앗고(막12:40), 율법의 의와 인과 신을 저버렸습니다(마23:23).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를 삼키는 자들이었습니다(마23:24).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 스스로는 "자기를 의롭다"(눅18:9)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꾸몄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눅18:12), 박하와 운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도 드렸습니다(마23:23). 그들은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인사받는 것과 선생이라고 칭함 받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마23:5-7). 그러나 심판의 기준이 되시는 예수님에 의해 그들의 본색이 철저하게 드러났습니다. "외식하는 자"로서(마23:15), "지옥 자식"(마23:15)을 양산하는 거짓 교사로서 준엄한 책망과 비난을 면하지 못했습니다(마23:27).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모든 허위와 궤계를 꿰뚫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숨겨질 죄란 없습니다. 인생의 궁극적 판단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나무의 그 열매입니다. 반대로 열매를 통해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열매를 맺는 나무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나무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의 나무요, 축복의 나무요, 헌신의 나무요, 화평의 나무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그러한 나무들이라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악한 열매가 아니라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불의한 열매가 아니라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미움의 열매가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증오의 열매가 아니라 용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복음을 전하여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19세기 독일의 세계적인 작곡가 멘델스죤이 하루는 후리드버그라는 곳의 오래된 예배당을 찾아갔습니다. 그 예배당에는 거대한 파이프 올갠이 있었는데, 관리인에게 파이프 올갠 좀 연주해도 되겠느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관리인은 생소한 사람이 와서 올갠을 연주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선뜻 허락해 주지를 않고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멘델스죤은 거듭 부탁을 했고, 한참 후에야 관리인은 허락을 했습니다. 파이프 올갠 앞에 앉은 맨델스존의 손가락이 서서히 음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예배당 안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연주를 감동에 찬 모습으로 끝까지 들은 관리인은 감격에 겨워 멘델스죤에게 다가가 "당신은 누구십니까?"고 물었습니다. 그 때 멘델스죤은 자신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의 이름을 들은 관리인은 깜짝 놀라며 하마터면 당신같은 위대한 음악가를 문전 박대하여 내 쫓을 뻔 했다고 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성도는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의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풍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진짜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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