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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생활

히브리서 강해 14

관리자 2017.02.15 17:14 조회 수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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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일한 속죄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   10:1-39
    (1) 불완전한 제사 10:1-9

1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 즉 복음에 대하여 그림자와 같고 비유와 같은 형식적인 것이므로 해마다 드리던 법대로 드린 것뿐이요 결코 그 제사를 드리는 자들로 하여금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

 

2절:
    만일 율법대로 드리는 제사로 완전함을 얻을 수 있었다고 가정하면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한 번 드리는 것만으로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의 생각이 나지 않았어야 옳다. 그 후에는 범죄도 다시 하지 않고 따라서 속죄제를 드릴 필요도 없다. 그런즉 율법대로 드리는 속죄제는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완전한 제사의 비유에 불과한 것이다.

 

3절:
    바울의 말과 같이 율법의 효용은 죄를 알게 함에 있다(롬7:7).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속죄제를 드림으로 처음에는 마음에 평안함을 느끼게 하였으나, 지나고 보면 [이 제사들은] 오히려 또 죄를 지은 것이 생각나게 해서 다시 속죄제를 드리지 않고는 마음의 평안함을 계속할 수 없게 함으로 이 제사는 반복될 수 밖에 없었다.

 

4절:
    [이는] 구약의 계명이나 율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데는 효용이 있기는 하나 결국 죄를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은 못 된다. [황소와 염소]처럼 이성이 없고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는 짐승을 죽여서 그 피로 사람의 죄를 청산할 수 없다. 완전하신 대제사장이 완전한 제물을 가지고 완전한 방법대로 단번에 드리는 이상적 속죄제에 이르러 비로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히9:11-15). 

 

5절:
    5-7절은 시편 40편 6-8절의 인용인데,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제를 드릴 사명에 대한 각오를 표현하셨다. [세상에 임하실 때]는 성경학자들 사이에 주장하는 바가 많은데, (1)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때 즉 초림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고, (2) 그리스도가 성년이 되어 침례를 받고 전도사업에 헌신할 때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나, 그 중에 육신을 입고 탄생하시는 때를 말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다.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는 말씀은 70인 번역문대로 인용한 것이지마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다(시편 40편 6-8절과 비교).

 

6절:
    번제는 희생을 불에 사르는 제사요, 화제는 동물성뿐만 아니라 식물성이라도 불에 살라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속죄제는 자기가 범죄하였을 때에 드리는 제사로 모든 제사 가운데 가장 근본적 제사인데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7절:
    [내가]는 윗 절의 [나](나를 위하여-6절)와 함께 본질적으로는 시편 기자인 다윗이 자기를 가리킨 것인데, 여기서는 이 시편을 메시아에 대한 시편으로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루마리 책]은 성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에는 온 성경이 아직 편집되기 전이므로 율법이나 기록된 예언서들이 다 각각 딴 두루마리에 쓰여 있었다.

 

8-9절:
    율법을 따라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아니한다고 말한 뒤를 이어 그리스도가 아버지 앞에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였으니 구약보다 신약은 완전한 속죄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히브리서 기자의 목적하는 신약이 구약보다 우월하다는 논변은 여기서 결론 지어진다.

 

    (2) 완전한 제사 10:10-18

10절:
   우리는 다 죄인이다.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이 뜻을 쫓아-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즉, 그리스도가 단번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하게 하심을 입었다.

 

11-13절:
    11절에서는 위에 있는 1절과 4절 두절말씀을 한 번 다시 분명하게 하였고 12절에서는 9장 12절의 말씀을 다시 좀더 확실하게 하고 12절로 13절에서는 1장 13절에서 인용하였던 시편 110편 1절을 다시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공과 승리를 증거하고 있다.

 

14절:
    [저가 한 제물로]는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거룩하게 된 자들]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드리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함이다. [영원히 온전케] 하신다는 것은 범하였던 죄를 벗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마지막에는 육신까지 그리스도안에서 부활하여 영원세계에 가기까지 구원을 완성하게 하신다는 의미다.

 

15절: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는 히브리서 3장 7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성경말씀은 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만큼 (벧후1:20-21) 아래 인용하려는 시편 말씀도 성령의 증거라고 함이다.

 

16절:
    히브리서 8장 8절 이하에서 인용하였던 예례미야서 31:33절을 다시 끌어다가 새 언약은 어떻게 완전하고 확실한지 증거하였다.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새 언약을 세운 백성 곧 그리스도 교회의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을 항상 마음에 두고 실수하지 아니하리라는 예언이다.

 

17절:
    윗 절의 계속으로 예례미야서 31장 34절 말씀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새 언약을 세운 백성의 죄와 불법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거듭 말씀하셨다.

 

18절:
    [이것을 사하셨은즉] 즉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하는 말씀은 성도들더러 이제는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해서 노력도 하지 말고 기도도 드릴 것이 없다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드린 이상적 속죄제는 완성된 것이요, 궁극적인 것이니만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구주가 되심과 그리스도의 종교는 절대적 종교인 것을 확신하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성도가 만일 짐짓 죄를 범한다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단언하였다(히10:26: 6:6).

 

    (3) 성소에 부지런히 나아갈 것 10:19-25

19절: 
    [그러므로] 즉 죄와 불법을 사하셨은즉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을 만났고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별명이 임마누엘인 것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이 예수 안에서 함께 있게 되었다.

 

20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성소에 까지 가시기 위하여 길을 여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시간에 성전휘장이 찢어졌다. [이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만일 예수께서  레위인 제사장이셨으면 둘째 휘장을 들고 지성소로 출입하셨겠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으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휘장을 찢어지게 하사 누구든지 자유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실 표로 그 육체를 찢어 십자가위에서 죽으셨다.

 

21절:
    [하나님의 집]은 교회를 가리킨 것인데(엡2:22, 3:17, 딤전3:15, 히3:6) 옛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요 성도들의 교회였다.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성전을 관리하는 이는 대제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성도들의 대제사장이시니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집을 맡아 관리하시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 따라서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22절:
    고대사회 서아시아 여러 나라 신당에는 뜰 안에 맑은 물을 샘솟는 것과 같이 만들어 놓고 거기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은 그 물로 손을 깨끗이 씻었고 신당에 출입하는 자들도 그 물에 손을 씻게 하며 또 그 물을 마시게 하였는데,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하면서 핍박등의 주위 환경에 굴하지 말고 온전한 믿음을 지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신앙행진을 격려하고 있다.

 

23-24절:
    약속의 주장자이신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딤후2:13)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이유도 없고 [소망을 움직이지도 말고 굳게 잡아] 용맹있게 나아갈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 예수의 새 계명을 지키는 동시에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최선의 생활을 하자고 권면한다.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는 사람은 사도 때로부터 말세에 이르기까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 사도행전 때에 하던 대로 떡을 떼며 교훈을 받으며 기도하고 전파하지(행2:37-42, 4:23-37) 아니하고 여기저기로 헤어져서 은혜 받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만일 교회란 말에 가르치는 것과 모이는 것이 없으면 이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행동이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이란 말씀은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말한다.

 

    (4) 배교자는 무서운 죄벌을 당할 것이다 10:26-31

26절:
    26-31절에 있는 말씀은 6장 4-8절의 말씀과 의미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데 성경말씀 중에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려운 중요한 교리가 포함되어있다. 사람이 한 번 진리를 알아 새로 난(거듭남) 다음에는 결코 아주 타락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칼빈 신학의 요점이다. 이는 칼빈 뿐만 아니라 바울이나 어거스틴의 교리해석에도 기초가 되어있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6장 4-8절과 10장 26-31절 두 곳의 말씀을 통해 참 이치를 알다가도 배교할 수 있음을 긍정한듯하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알면서 짐짓 짓는 죄는 가룟 유다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가룟 유다는 주님의 사도이었고 전도자였던 사람이니만큼 반드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리의 한 부분을 알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배교자가 되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란 말은 [진리를 안 후]란 말과 다르다. 말하자면 신학자나 철학자는 진리를 아는 지식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을 곧 진리를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경우다. 반면에 무식한 자라도 진리를 아는 지식은 있다고 할 수 없으나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짐짓 죄를 범하는]것은 알고도 짓는 죄를 말하는 것이다(신17:2-7절). 세상 나라의 법률도 법률을 알지 못하고 준수하지 못한 것과 법률의 의미를 잘 알면서도 준수하지 아니한 것과는 같이 다루지 않는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말은 다시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고 하는 최후의 말이다.

 

27절:
    인간은 다 죄인이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끊어졌었다. 여기 아직 남아있는 소망은 속죄함을 입어 다시 생명의 원줄기에 접붙임을 받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실낱같은 길까지 아주 막혀 버린 후에는 오직 (1)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히9:27), (2)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는 것이다(히10:27, 12:29).

 

28절:
    모세의 율법 가운데 법을 범한 죄인은 두세 증인들의 증거에 의하여 정죄된 후에는 구제할 길을 찾지 아니하고 돌로 쳐죽였다(신17:2-7). 예수께서 교회의 법규를 범한자를 재판하는데도 두세 증인의 증거로 결정하라고 하셨다(마18:16). 따라서 본 절이 말하는 것은 구약 보다도 우월한 신약의 복음에서 모세의 율법보다 우월한 그리스도의 진리를 배반하는 자의 받을 벌은 얼마나 무겁겠느냐는 의미가 된다.

 

29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배반하는 자들의 죄상을 세가지로 나타내었다. (1)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것] (2) [자기를 거룩하게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긴 것] (3)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지었다. 이 세 가지는 다 사형에 해당한 중죄임을 나타낸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용서할 수 없는 중죄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고(마12:31-32) 성령이 증거하셨다(행5:3-11).

 

30절:
    신명기 32:35-36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원수 갚는 진노를 기억하게 한 것인데,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여 해하려 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도리어 선행을 베풀라고 이 구약말씀을 인용하였다(롬12:19-21). 우리 인간은 마음이 좁고 보는 것과 아는 것이 적어 항상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것은 속히 얻기를 바라고 자기에게 나빠 보이는 것은 속히 없어지기를 기다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신 처분을 바라는 마음이 부족하다.

 

31절:
    세상 사람은 누구나 다 얼마동안 살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것이기 때문에 원수가 자기보다 먼저 죽기를 기다릴 수도 있고, 때로는 자기 수완이나 계획을 가지고 그런 결과를 얻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고 또 지극히 선하시기 때문에 그 손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5) 담대함을 버리지 마라 10:32-39

32절:
    [너희가 빛을 받은 후]란 말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고난의 큰 싸움]은 가족의 큰 반대나 사회의 비방이나 정권의 박해를 받아 뒤로 물러앉는 것과 같은 것을 가리키는데 고난을 영적 전쟁으로 묘사하여 [싸움]이라 표현하고 있다. 

 

33절:
    [비방]을 받는 것은 명예손상과 인격무시를 받는 것이요, [환난]을 받는다는 것은 신체의 형벌과 재산의 몰수와 같은 것을 당하는 것과 같다.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는  당시에 성도라고 해서 다 감옥에 갇히거나 사형장에 나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친교가 있었다는 혐의를 받는 것과 같다.

 

34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이란 말은 그들의 전일 신앙이 훌륭하였던 것을 증명한다. 이런 일들은 갇힌 자를 동정하고 견실한 신앙을 지니고 간절한 사랑을 발휘하며 담대한 태도를 가지지 못하고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기쁘게 당한 것]은 히브리인 성도들이 복음의 참 빛을 받았기 때문에 앞에 있는 큰 소망을 바라보고 모든 좋은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대하여 그들이 이와 같이 행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고 칭찬하면서 격려하였다.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은 하늘에 간직해둔 산 소망이다(행4:32-35, 20:32, 벧전1:3-4).

 

35절:
    이렇게 복된 큰 소망을(딛1:2, 2:13) 가진 사람들은 그러므로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인내하며 소망으로 기다리면 [큰 상을 얻느니라]고 격려하였다.

 

36절: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아니면 약속을 받을 수 없고(마7:21) 또 오랫동안 인내하지 아니하면 약속의 성취를 바랄 수 없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또 한 번 구약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곧 소예언서인 하박국 2장 3-4절의 말씀으로 이 두절 역시 70인역대로 인용하긴 했지만 자유롭게 인용하였다. 문자 그대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 의견을 진술하기에 적당하도록 번역해 놓았다.

 

37절:
    하박국은 기원전 7세기의 예언자로 조만간에 갈대아인(바벨론인)이 침공해 들어올 것을 예언했다. 여기서 [잠시 잠깐 후]에 속히 오겠고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은 바벨론인이 이스라엘 나라의 지경으로 쳐들어올 것을 가리킨 것인데, 유대인의 랍비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그 오실이란 메시야를 가리킨 것이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도 랍비의 해석을 들은 대로 메시야를 가리켜 [오실 이가 오시리니]하고 인용한 듯 하다. 이 [오실 이]란 말은 복음서 기자들도 같이 사용하였다(마11:3, 눅7:19).

 

38절: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바울에 의해 로마서 1장 7절에 인용되었고 이 말씀을 통해 성도는 복음으로 의인이 되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그리스도교의 최고진리를 설명하게 되었다. [나의 의인]에서 의인의 임자가 하나님이심을 밝힌 것은 사람이 자기의 의지나 노력으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사람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게하신 것을 의미함이다.

 

    죄인이면 죄값으로 죽을 것이요 의인이면 의로 말미암아 살 것이지마는 인간에게는 의가 없고 죄가 있으므로 다 죽어 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게하는 새로운 방법을 마련하셨다(롬3:19-28).

 

39절:
    [또한 뒤로 물러가-shrink back]면 [침륜에 빠져-destroyed] 멸망할 사람이 되고, 앞으로 나아가면 구원을 얻어 살 사람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고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 믿음과 전진이라고 강조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 장인 11장에 가서 믿음에 대해 논하고, 또 12장에서는 전진하는데 목표가 된 소망을 논술하고 있으며, 마지막장인 13장에서는 사랑을 가르쳐 기독교의 세 가지 큰 덕행이 되는 신앙(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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