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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 인류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5-7장
1) 대제사장의 제도 5:1-14
(1) 아론같이 부르심을 입은 자 5:1-5
1절: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뽑아 내어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하는 데서 극히 존귀한 지위도 되고 심히 유익한 사업도 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 가운데서 취함을 받은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된다. 즉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림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열림이며 하나님이 임재하사 인간을 만나 주시는 관문이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의 드림은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고 중재역할을 하는 대제사장 자신에게도 필요한 은혜의 행위다.
2절:
이처럼 대제사장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대제사장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택하심을 입었지만 사람들 가운데서 뽑혔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도 필경 사람이기 때문에 [무식하고 미혹한 자]라는 범주(카테고리)를 벗어날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사람이든지 다 포용할 수가 있다.
3절: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릴뿐 아니라 [또한 자기를 위하여서도]속죄제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데, 이는 남의 죄를 인하여 속하는 제사를 드릴뿐 아니라 자기도 직분적인 차이는 있으나 죄인인 까닭에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지 않고는 남의 죄를 속량하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4절:
그런데 설사 완전한 자이기 때문에 받은 직위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의 역할로서 속죄제사를 인도할 수 있는 직위라고 하는 것은 존귀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런 존귀한 대제사장의 자리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는 즉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셔서 맡기신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아론이 본래 보통 일반적인 사람과 다를 바 없었지만 하나님의 지시하심의 은혜 가운데 대제사장으로 뽑혀서 특별히 만든 에봇과 에봇 받침을 입고 가슴에 흉패를 붙이고 머리에 관을 씌우고 관앞에 패를 달고 거룩한 위임식을 통해 직분을 감당하게 되는데, 그리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서 직분을 감당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아론이 받은 대제사장 직분은 이와 같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하에서 주어지는 성직이었는데, 아론 보다 더 큰이가 있으니 그가 흠과 티없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류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강조하고 싶었다.
5절:
과거 몇 천년동안 세계 각 민족 각 국가의 모든 제사장들의 권위와 사업과 영광의 집대성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천지만물의 통치자와 많은 사람들의 속죄자로 나타나시는 것도 자기 스스로가 취하신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한 경륜으로 맡기신 것이다. 본 절에서는 히브리서 1장 5절에서 인용했던 시편 2편 7절을 다시 인용함으로서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5:6-10
6절:
본 절에서는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하여 히브리서의 특별한 표어를 제정하게 됐는데, 본 절이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즉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함은 한참 후대가 되는 다윗 왕 이후에는 24반열을 마련하여 그 반열을 따라 대제사장이 세워졌으나, 그리스도는 이 반열을 초월하여 영원한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되셨다는 의미다. 멜기세덱에 관한 상세한 것은 7장에 가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의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르심을 받아 제사장이 된 멜기세덱은 장차 오실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곧 그림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사람의 본분을 지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 곧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간절한 기도를 드림으로 [들으심을 얻]으셨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다는 말씀이나 애쓰고 힘쓰심으로 피땀을 흘리셨다는 말씀은 복음서에 기록 되있으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는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의 보다 강력한 표현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8-9절:
그리스도는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마는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움으로 자기의 사명을 완성하셨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더욱 고난을 참으며 순종하고 배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미를 내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 완성은 우리에게 모범이 되고 목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 이에 반하여 좋은 가르침을 남긴 공자나 삶의 깨달음을 설파한 석가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다 우리의 모범이 되고 우리의 사표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은 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어 흘러 넘쳐 나아갈 수 있다.
10절:
이와 같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9절]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다윗 때에 세운 여호야립(대상 24:7)의 반열이나 아비야의 반열과(눅1:5, 대상 24:10) 같은 인위의 반열에 의한 것이(대상24장) 아니라 아브라함보다 먼저 임명하심을 받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고 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언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삶을 지배해 왔던 제사장의 직분보다 더 뛰어나신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신앙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 위에 뛰어나신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
(3) 멜기세덱 반차가 의미하는 오묘한 뜻 5:11-14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그러나 사람들이 [듣는 것이 둔하므로] 아무리 오묘한 뜻을 잘 알고 잘 해석하여 가르친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잘 듣지 아니하고 또 들어도 잘 깨닫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 본 절을 원문 차원에서 직역을 하자면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할말이 많기는 하나 너희가 배우는 것이 느리니 설명하기 어렵다]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할 말은 많으나 배우는 것이 둔하다면 설명하기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4장 2절을 통해 히브리서 기자가 일찍이 언급한 바와 같이 듣는 자가 그 들은 말씀과 믿음을 하나되게 화합할 줄 알아야 비로소 유익하게 되는 것처럼, 멜기세덱의 반차에 대해 설명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의 마음이 없다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3:9,43; 계2:7,11,17,29, 3:6,13,22)] 말씀하셨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이다.
12절:
[때가 오래므로] 라는 지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편지를 쓰는 때는 서론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주후 60-70년 사이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이 복음을 받은 지 30년이 넘었을 듯한 시간적 계산이 나오는데, 그러므로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11절]고 하는 빨리 깨닫지 못함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책망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라는 언급은 6장 1절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이 말의 뜻은 처음으로 배우는 알기 쉬운 단계의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대학 교육에 비할 때 이는 마치 몽학선생의 가르치는 것과 같은 초등학문이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인 어린 아이가 만일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된다면 유약한 소화기관 탓에 그런 것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없으므로 탈이 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교리를 가르치기는 하면서도 권면과 격려와 경고하는 말을 가지고 자극시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역사적 실례를 들어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을 시도하기도 한다.
13-14절:
어떤 아이는 서너 살이 된 이후에도 어머니의 젖을 찾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그럴 경우 어머니에게도 해가 되고, 아이에게도 해가 된다고 한다. 아이가 성장을 하면 젖에서 이유식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리고 서서히 단단한 음식을 섭취해야 소화기관도 정상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신체적으로도 정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 만일 아이가 자라 여러 가지 영양소를 필요로 하고 있는데,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단단한 음식도 먹어야 하고, 때로는 기름진 음식도 먹으며 필요한 영양분을 채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음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완전하고도 정상적인 발육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단단한 식물] 먹기를 배워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도 오랫동안 믿어 왔으면 신구약 성경의 깊이 있는 말씀에도 도전을 해야 하고, 그리스도 신앙의 깊은 교리에도 들어갈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점점 자라 믿음의 분량이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엡4:15).
언제든지 과잉 보호가 자녀를 병들게 하고 망치게 하는 것처럼 신앙 교육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의 모습을 방관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또 그렇다고 해서 성급하게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린 아이같은 신앙을 가진 자에게 지나친 것을 기대함으로 자칫 좌절케 해서도 안 된다.
본 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기대하는 것은 유대인 크리스챤들은 이미 복음을 받은 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받을 만큼 성숙한 신앙이 되지 못하여 더 깊은 은혜의 말씀을 전하기가 어려운 상태인데, 그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을 탈피하기를 바라고 있다. 만일 유대인 크리스챤들이 복음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초 신자들이었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이미 구약의 은혜를 아는 백성이요,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인 환경 요소들로 인해 더 이상의 신앙의 진전이 없음에 안타까워 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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