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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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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가복음 11:1-10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모습, 어떤 마음으로 주께서 입성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최후의 예루살렘 입성은 죽으심과 부활로 이어지는 영적 의미의 까닭에 "승리의 입성"이라 부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열열히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을 고대하던 이 무리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암시해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 깊은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1. 일반적인 왕들의 입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결코 화려하거나 거창하게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하고 고대했던 그런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입성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적들을 섬멸하고 적들의 성을 정복하는 자처럼 위세 당당한 모습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초라하리 만큼 소박했고, 겸손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속성과 모습을 보여 주는 대목이 됩니다.

 

    1) 예수님은 겸손한 분으로, 겸손한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나라를 정복하고 단순하게 지배하기 위해서 그 도성에 입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인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실 장소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의 입성은 고난받는 종의 입성이었습니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속수 무책인 인간의 죄를 속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몸소 고난을 자처하시는 종으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거만하고 거칠고 난폭한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순종하시는 종의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력이나 권력의 통치자가 아닌 사랑의 통치자로 오셨습니다.
    겸손하게 죽음의 잔을 마시기 위해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통치자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따라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우리 믿는 자들에게 열어 주시기 위해 죽음을 예고한 예루살렘 입성을 단행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용서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무력과 완력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통치하십니다.

 

    3)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평화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말은 전쟁을 의미하고, 폭력을 의미하고, 힘과 권력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고 오심으로 평강의 왕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4) 또한 나귀 새끼를 타심은 권위를 나타내 주는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나귀를 타신 사건은 겸손과 사랑이라는 측면 외에 권위라는 측면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만 왕의 왕, 만유의 주가 되시는 권위로 입성하셨습니다. 메시야의 권위, 구속주의 권위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즉, 하나님의 권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권위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십니다.

 

2. 군중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였습니다.
    "자기 겉옷과...뒤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10절) 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한 자들은 대부분 주님을 따르던 군중들이었습니다. 일부 고향에서부터 주님을 따르고 있었던 소수의 제자들과 여인들을 제외해 놓고선 대부분이 예루살렘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계층적으로 보아 지위가 높고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 대부분이 가난에 시달리고 소외당하는 계층이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는 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하고 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경제적으로 빈곤을 면치 못하고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고 찬양하였던 자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앞에 자기의 겉옷을 벗어 깔고 혹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그 앞에 깔고 온 힘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환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예수가 자기들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메시야가 되어서 당시 이스라엘의 지배국이었던 로마의 압제와 특권층의 착취로 인한 빈곤에서 해방시켜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따르고 있는 군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야로 기대하고 인정하며 따르고는 있었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해방시킬 영혼의 구원자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정치적인, 경제적인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군중들 속에 우리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호산나 외치는 우리의 심정은 예수님을 어떤 마음으로 영접하고 있습니까? 정치적인 메시야, 경제적인 문제 해결사 되시는 메시야로 환영하며 환호하는 예루살렘 군중들 속에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없는지 이 시간을 통해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때 당시의 군중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최악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역사적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대망케 하기에 족했으나 그들이 애타게 기다린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왜곡되고 편향된 메시야관이였습니다. 늘 압제받는 그들에게 자유를 줄 자, 주리고 빈곤한 배를 채월 줄 수 있는 자, 쓰라리고 고통스런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진  능력자, 그들의 나라를 로마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시켜서 부강하고 강성하게 이끌고 갈 강력한 지도자이기를 기대하는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이 팽배해 있을 때 마침 나타난 분이 나사렛 예수였고, 그들은 예수를 좇아 다니면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수많은 이적들을 눈으로 보고 자기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환호했던 환호성은 올바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이 지닌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메시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이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분임을 알게 된 군중들은 몇일이 지나지 않아 분노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들이 되어 버리고 만 겁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계층이나 특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일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부의 신학자들은 특정한 계층과 역사적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예수께서 오신 것이 죄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부조리한 삶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라 하여 해방신학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간 해방이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또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경제적 해결사로 기대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자, 물질적인 축복을 주심으로 자신을 부요케 해 주실 자,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힘이 되 주 실 수 있는 분 등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이 부분적으로 다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 영생의 문제, 구원의 문제, 하나님 나라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는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평안도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가운데 "용강 머슴"이라는 유명한 익살이 있습니다. 옛날 평안도에 머슴이 살았는데 그는 생각할 줄 모르고 행동할 줄만 아는 머슴이었답니다. 하루는 주인이 머슴을 불러 "애 내일 아침 일찌기 용강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분부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이 아무리 이 머슴을 찾아도 보이질 않았는데, 점심때쯤 돌아온 머슴이 호통치는 주인에게 "저 주인님 말씀대로 용강에 갔다 왔는뎁쇼"하더랍니다. 그는 왜 용강에 갔다 와야 하는지를 생각지 못하고 그냥 다녀왔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 속에서 성도님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본질적인 이유를 알고 따라가고는 있는 것입니까? 당시 예루살렘에 운집해 있던 수 많은 무리들이 군중심리에 이끌려 너도 나도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은 홀로 외로운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호산나 외치던 군중들의 환영의 목소리가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자기 소원을 충족시키지 못한 폭도들의 소리로 들리지는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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