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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7/5/14 성도의 바른 가정생활

관리자 2017.05.13 22:33 조회 수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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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골로새서 3:18-4:1  

 

    사도 바울은 3:1-17절의 말씀을 통해서 새 생활의 신앙 원리에 대해서 교훈하였고, 이어지는 본문 말씀에서는 새 사람이 된 성도의 가정생활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연 새 사람이 된 성도들의 가정 생활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가정의 평강은 모든 면에 근원이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가정 생활에서부터 새로워 져야 합니다.

 

1. 부부간의 관계와 도리 (18-19절)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원리는 상호 윤리의 의무이므로 남편과 아내는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아내들에게 권고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정신에 있어서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복종은 사랑에서 이루어져야 미덕이 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복종"(submit)이라는 단어는 복종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맡긴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즉 남편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 그것이 올바른 복종입니다. 그런데 그 복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바울은 분명히 해 두고 있습니다. 가정생활의 모든 기초는 온전한 사랑과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와에게 내린 형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한 형벌로 남편은 아내를 주관하고 아내는 남편의 주관에 복종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랑은 조건부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사랑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사랑할 수 있는 그 사랑으로 아내를 대하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보기 싫어도 사랑해야 하고, 젊어서뿐만 아니라 늙어서도 사랑해야 하는데, 부부간의 사랑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성도들은 이 신성한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 그리할 때 가정의 행복은 이뤄집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법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가르치셨고, 또 몸소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그같은 사랑이 부부간에 이뤄지게 될 때, 그 사랑을 통하여 첫째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둘째는 육신적 행복이 보장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할 뿐만 아니라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멸시하고 학대하는 것은 곧 자기를 멸시함이요, 학대함입니다. 결혼은 남편의 편리만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 양자의 생활 중에서 새로운 기쁨과 완성을 위한 것이므로 서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아내들은 주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시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2.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와 도리 (20-21절)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와 도리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자녀의 의무는 부모에 대한 순종이요, 부모의 의무는 자녀에 대한 이해와 사랑입니다. 순종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듯이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부모를 향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가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게 될 때 이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평안케 해 드리는 일이고, 즐겁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모든 일에...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되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모든"은 신앙 안에서의 "모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자칫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은데, 앞뒤 문맥을 살피고 context에 맞게 해석할 때 바른 의미가 전달될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씀에서의 "모든"이라는 단어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모든"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컨데, "친구를 사귈 때는 가려 사귀어라"라든가, "말을 할 때는 거친 언어를 쓰지 말고 고운 말을 하거라" 라든지, "낭비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아라" 등의 생활속에서의 순종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의 말씀을 보면 골로새서의 말씀이 의도하는 의미가 좀더 명확해 지는데,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가운데 "주 안에서"라는 말씀이 문법적으로 "순종의 근거"를 의미하는 즉, (ablative: source-원천, 출처, origin-기원,발단, departure-출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처럼(원천, 기원, 시작)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라는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원문적인 의미로 살펴 볼 때 해석상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글 성경의 번역을 따르면 "순종"이라는 생활이 "주 안에서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행위"인 것으로 번역 되 있으나, 본래의 의미는 부모에 대한 순종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번역이 옳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의 말씀에 순종해서 부모님께 순종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위임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따라 부모 공경하시는 성도님들 되십시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만들어 악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면 이는 결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부모의 의무는 자녀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바른 길 가도록 징계하는 것만이 아니라 격려하는 것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징계와 격려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낙심할까 함이라"
    이처럼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자녀들이 결과적으로 낙심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자녀들을 향한 이례적인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가 책망과 같은 비례로 격려해 주지 않으면 자녀들이 낙심하기 쉬운데 그러지 말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위탁하신 겁니다.

 

3. 종과 주인의 관계와 도리 (22-4:1절)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부부간이나 부모 자녀간보다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하여 더 많은 교훈을 했습니다. 종은 주인의 눈 앞에서만 봉사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대하는 신앙심으로 주인을 대하게 될 때 거기에는 신뢰가 있고, 참된 헌신이 있으며, 서로간에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사람에게 역사하시고 사람은 사람을 통해 주님께 봉사한다는 원리가 분명한 곳에 기독교의 윤리가 나타납니다.

 

    "눈 가림만 하지 말고...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가식적으로 하는 행위나, 고용을 당한 자라는 입장에서 사무적 의무감으로 일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 하여" ("주님을 존경하듯"이 원문에 가까운 의미) 거짓됨이 없이 성실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가르치는 바울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라 했고, 그의 그리스도의 종 된 삶은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이고, 성실한 믿음의 행위였기에, 종들에게 성실함으로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5절 하반절에 보면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4장 1절의 말씀뿐만 아니라 에베소서에도 상전들에 관련된 명령의 말씀이 기록되 있는데, 에베소서 6장 9절의 말씀에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하늘에 계신 상전-곧 하나님)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기록된 말씀이 골로새서에 기록되 있는 말씀보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 주인의 보수는 공평하지 않을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상은 공평하시고 넉넉하십니다. 육체의 상전이라고 하는 주인 또는 고용주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의와 공평입니다. 의와 공평이 시행될 때 그 사회는 번영하고, 의와 공평이 무시될 때 그 사회는 부패하고 맙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요, 공평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주인은 에베소서 6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종이 주인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있음같이 주인도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이나 주인이나 모두 하나님께 책임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땅 위의 관계는 잠시뿐이지만 하늘의 관계는 영원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의 표준을 하나님께 두고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의로우시고 공평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또한 다른 이들에게 의롭고 공평해야 합니다. 이는 불가불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롭고 공평하신 잣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의 가정생활과 사회 생활은 한 마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야 합니다. 부부간에 사랑으로 도리를 다하십시다. 부모와 자녀간의 당부하신 말씀대로 사십시다. 사회에서도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고 의와 공평으로 사는 성도님들이 되셔서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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