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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7/6/11 두 종류의 장애자

관리자 2017.06.10 20:11 조회 수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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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태복음 12:22-28

 

    인간이 누리는 행복의 조건 중 하나가 건강이라는 것을 아마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건강을 잃은 사람, 곧 신체적 장애자는 어떤 면에서는 불행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귀신이 들려서 눈 멀고 벙어리 된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애자 중에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가장 불행한 장애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리를 절어도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으니, 장님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손을 하나 못 쓴다 할지라도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을 보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니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보다는  장애의 불행이 덜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장애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뿐만 아니라 말까지 하지 못하는 장애자였습니다. 이루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 그들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육신은 건강했으나 그들의 영혼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영적 장애자들이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고침받은 행복한 장애자가 있는가 하면 고침받지 못할 불행한 장애자가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깨달으라 하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1. 고침받은 장애자가 있습니다. 장애자였으나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병을 앓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치유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강을 잃은 자는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건강을 회복하기를 염원합니다(막5:21-28). 그러하기에 주님 주변에는 건강을 잃은 신체 장애자들이 끊임없이 몰려왔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 사람, 곧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리가 된 자"가 사람들에 의해서 주님께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시력과 언어를 잃어버린 장애자입니다. 시력을 잃었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기에 온 세상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일겁니다. 또한 언어 장애는 자신의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방법을 잃어 버렸으므로 자아를 상실당한 사람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불행하였고, 그를 보는 사람들 또한 마음이 안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이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젠 슬픔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을 얻고 또 자기를 얻은 이 기쁨의 사람은 비록 장애자로 태어나기는 했었지만 지금은 행복한 장애자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치료를 받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주목할 사항이 있었습니다.

    1) 그를 데려온 자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2) 그가 만능의 의사이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시기 위해,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 주시기 위해, 모든 죄인들에게 용서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침받음은 육신의 질병만의 고침을 뜻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치료를 뜻합니다. 육신의 불구가 치료됨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받았던 마음의 상처까지도 완전하게 치료받았습니다. 이는 구원의 은총이 함께 하신 완전한 구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2. 눈을 뜬 이 장애인처럼 우리의 눈도 띄어져야 합니다.
    말 못하던 벙어리의 입이 열려진 것처럼 우리의 입도 열려져야 합니다. 귀신 들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깨끗이 낫게 된 역사는 또 한가지의 기쁨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장애자를 고쳐 주시는 주님의 역사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까지도 열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뜻합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기록하기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자신들을 모든 속박으로 부터 해방시켜 주고 구원해 줄 구세주시라는 말입니다.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절망하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신 주님이 하신 사역은 참으로 메시아가 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그의 능력은 하나님의 권세 그 자체였습니다. 이 모든 기적적인 사건들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진 메시아의 사역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병고침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임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 눈이 열려지는 은혜가 임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병이 고침을 받았을 때 우리는 신앙의 눈까지 열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기쁨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병고침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육신의 질병 치료만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육과 영이 함께 치료받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가지고 주님앞에 나와 고할 때에, 그 문제의 해결만 바라 볼 것이 아니라, 내가 직면한 문제속에서 나를 위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져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해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3. 고침받지 못할 불행한 장애자가 있음을 또한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기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 장애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신체의 장애자가 고침을 받고 감격하며 또한 그와 함께 한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깨닫고 고백하며, 기쁨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오직 바리새인들만은 같은 장소에 있었으면서도 같은 감격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며,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장애자가 아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인 예수님을 눈 앞에서 보고도 그가 누구신지를 보지 못하며, 그가 누구신지를 올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그가 하시는 일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부정하는 말을 하고, 비방하는 말로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심각한 장애자요 영원히 불행한 장애자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들은 이런 불행한 장애자가 되었을까요?

 

    1) 믿음의 눈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일하에 드러나게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볼 때 분명히 메시아의 사역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의 눈은 그것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 왕 바알세불에 사로잡힌 자로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같은 사건을 보고 이렇게 다른 평가를 내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을 잘 안다고 하는 그들 스스로 신앙의 교만에 사로잡혀 영안이 닫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영적 일을 분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교만한 마음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2) 뒤틀린 심령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일을 보고도 참되게 평가할 수 없는 마음은 장애를 일으킬 마음입니다. 그것은 뒤틀린 심령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장애만이 장애가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한 심령 역시 장애입니다. 육신의 장애보다도 마음의 장애가 사실 더 무서운 장애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는 육신의 장애자보다 마음의 장애자들이 더 많은 세상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마음이 병들어서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그래서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두르고, 이유 없는 반항심리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뒤틀린 심령은 가인과 같이 안색이 변하고 증오가 그 가슴에 타올라 끝내는 범죄를 초래하고야 맙니다. 뒤틀린 심령을 치료받기를 원치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영적인 장애자가 되었고, 후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3) 그들은 벙어리 아닌 벙어리였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보고도 메시아라고 말하지 못하는 그들은 말은 하지만 해야 할 말은 정작 못하는 벙어리였습니다. 참된 신앙 고백을 못하는 성도는 벙어리 성도입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입, 찬송하지 못하는 입, 영적 벙어리 신앙이라 그렇습니다. 육신적으로는 건강해 보이나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수년을 믿었어도 입을 열어 예수 복음 한 번 전하지 못한다면 영적 벙어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 한번 하지 못하는 성도들, 사람들에게 예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고 시인하는 고백 조차 못하는 성도들, 왜 예수 믿어야 하는지 한 마디도 설명 못하는 성도들, 영적 벙어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자랑할 줄도 모르고 전할 줄도 모르는 입이 열려져야 합니다.

 

    신앙의 교만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의 입을 왜곡되게 만들고, 우리의 귀를 변질 시킵니다. 우리 자신에게 어떤 장애가 있다면, 오늘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온전히 치료받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받는 것도 급한 일이겠으나, 우리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는 믿음을 기초한 신앙위에 굳건히 서는 것이 우선이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소경이요 귀먹어리였던 장애인이 주님 앞에 나와 치료 받은 사건은 단순히 한 사람의 문제 해결을 소개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 드리는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르게 예수 믿고, 바르게 신앙생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복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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