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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7/1/1 새해에는 이렇게

관리자 2017.01.07 16:44 조회 수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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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시편 131:1-3

    우리 나라 만큼 사계절의 순환과 구분이 명확한 나라도 많지 않습니다. 노르웨이 최 북단같은 경우는 겨울이면 몇 달씩 밤만 계속되고 여름이면 낮만 계속된답니다. 그래서 거기 사는 주민들은 1월 18일이 되면 여러 달 동안 계속된 밤이 끝나고 새롭게 솟아오르는 해를 보기위해 높은 산 위로 올라간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해를 보는 순간 "아침이다! 해가 솟았다!" 라고 소리를 지른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정동진이나 경포대에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12월 31일 저녁이면 많은 사람들이 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 31일 저녁 주님의 성전에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 했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 성도님들은 주님의 성전에서 2017년의 첫 주일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의 주제나 내용 가운데 새해니까 특별히 더 감사해야 된다는 공식은 없습니다. 감사는 언제나, 늘 감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지난 한 해는 헤아릴 수 없는 감사로 넘치는 한 해였습니다. 주님 떠나지 않고 믿음 지킨 것으로 시작해서 건강 지켜 주신 것 감사한 일이고, 주님 섬기게 해 주신 것, 전쟁 일어나지 않은 것, 굶주리지 않은 것, 오늘 여기 모여서 신년감사 예배 드릴 수 있게 지켜 주신 것 등등 헤아릴 수 없는 감사의 조건들이 있습니다. 새해를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맞이하고 지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해를 맞는 우리의 마음 가짐과 태도입니다. 달력은 바뀌고 또 바뀌겠지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바뀌지 않는다면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산주의자가 뉴욕 콜럼버스 광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기염을 토하며 외칩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 줄 수 있습니다". 그의 연설을 열심히 듣고 있던 한 기독교인이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새 옷을 입을 새 사람을 만드십니다". 새 옷보다는 새사람이 중요한것 아니겠습니까? 제아무리 좋은 새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그 속 사람이 새롭게 바뀌기 전에는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새 옷을 입는다고 살인 강도가 의인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옷만 갈아 입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시편 131편은 시편기자의 소박한 열망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데, 시편 기자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다짐이기도하고 소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편기자의 그 소박한 다짐을 새해를 맞는 나의 소망과 다짐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상고해 봄으로서 이 시간 저와 여러 분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하는 다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절에서 시편 기자 다윗은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라고 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후기 기록입니다. 즉 다윗이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며 불렀던 시가 아니라 최고 통치자인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에 기록한 시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라고 자신의 겸손을 표현했습니다. 겸손은 내적인 것이며 인격적 사건입니다. 겸손은 자포자기나 체념이 아닙니다. 겸손이라는 원문의 뜻은 "누르다, 낮추다, 괴롭히다"라는 뜻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누르고 낮추고 괴롭히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8:13-14절의 말씀을 보면 어느 죄 많은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이며 무가치한 존재이며 얼마나 잘못한 것이 많은 사람인가를 깨닫게 될 수록 겸손의 부피는 많아지게 됩니다.

    영국의 신학자 퓰리쳐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퓰리쳐는 대답했습니다. "만일 젊은이가 영국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네를 들어 써 주실 것이다". 성경 주석가인 베이커는   "인생은 계단과 같다.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밑으로 내려가면 자신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드보르작은 민족주의 낭만파 음악인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입니다. 특히 그가 작곡한 첼로 협주곡 "신세계 교향곡"은 많은 음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날 드보르작을 존경하는 프라하의 시민들이 그에게 꽃다발을 증정했습니다. 그 꽃다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게"라는 리본이 매어 있었습니다. 며칠 후 사람들이 드보르작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주었던 꽃다발은 드보르작의 작곡실 한 켠에 있는 베토벤의 흉상 밑에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드보르작이 직접 쓴 찬사의 글도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게...". 드보르작은 시민들의 찬사와 꽃다발을 받고 몸둘 바를 몰라 하며 고민하다가 자신의 음악세계에 결정적 영향력을 주었던 베토벤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겸손한 삶의 태도는 주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주님께 돌려야 하며, 주님이 받으셔야 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최고의 겸손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금년 한해 겸손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과욕을 버리고 살겠습니다 하는 다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1절 끝을 보면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지나친 욕심으로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일과 미치지 못하는 기이한 일이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허영된 삶이나 욕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1960년대 우리 나라 정치이슈는 "잘 살아 보세"였습니다. 그래서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라고 하는 노래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잘 살아 보자는 구호는 외치며 열심히 일해왔는지 모르나 올바르게 사는 훈련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잘살게 된 후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허영과 사치와 낭비의 물결이 홍수처럼 휩쓸어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속수무책이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힘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쓸 수 있는 힘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수명 자체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힘과 생명을 헛된 데 낭비하면 안됩니다. 돈은 매우 필요한 것이지만 그 돈을 벌기 위해 과욕을 부리면 결국 그 돈 때문에 인생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즐거움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쾌락만을 구하다 보면 자신의 인생은 망가지게 됩니다.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올바르게 사용해야 복이 되는 겁니다. 노력하고 힘을 다해 열심히 살되 욕심은 버립시다. 성경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평안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다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실컷 젖을 먹고 난 후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유식을 먹였을 때 아기의 표정과 엄마의 젖을 먹을 때 아기의 표정을 비교해서 관찰해 보라. 이유식을 받아 먹고 있는 표정은 만족한 표정이다. 그러나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표정은 만족의 정도를 넘어서 행복하고 평안한 표정이다"고 했습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 또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새해에는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며 살겠습니다 고백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외국 어느 미술 단체에서 미술작품을 공모했습니다. 많은 작품들이 출품됐는데 그 소재들이 다양했습니다. 구름 한 점도, 바람도 없는 망망 대 해에 떠 있는 배 한 척의 그림도 있고, 한적한 시골의 전원풍경을 그린 그림도 있었고, 꽃핀 들녘에서 가족들이 소풍을 즐기는 모습, 노을지는 석양에 한 쌍의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도 있었으며, 푸른 초장에서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 등 모두가 평화를 상징하기에 적절한 그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그림은 이런 그림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선작은 다름 아닌 "거친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가의 작은 오두막 안에서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풍랑이나 소란에는 아랑곳 없이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먹고 있는 갓난 어린 아기의 미소"였습니다. 아기의 최대/최고의 행복한 요람은 엄마의 품입니다. 집안에 돈도 있고, TV도 있고, 만화책도 있고, 언니 오빠도 있고, 장난감도 있고, 옷도 있고 별의 별 것이 다 진열 되 있다 할지라도 아기에게 있어서 행복의 요람은 엄마 품 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시편기자는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품 거기서 젖뗀 아이처럼 행복하고 평안이 넘치는 안식을 찾겠노라"말합니다. 다윗은 시편 17편 8절에서 하나님의 품을 "주의 날개 그늘"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품, 그 날개 그늘에서 쉬고 평화를 찾고 평안을 추구해야 합니다. 찬송가 478장의 내용에 "주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 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는 가사가 있습니다. 가사 내용처럼 살아가시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영원히 하나님만 바라며 살겠습니다 하는 다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3절의 의미는 이런 내용입니다. "나는 내 일생 하나님을 높이며 겸손히 살겠습니다. 헛된 일에 나의 건강이나 정력이나 소유를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품속에 살면서 젖 먹고 난 어린 아이처럼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그렇게 살기로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통치자로서의 바램을 피력한 말씀입니다.

    바란다는 것은 원한다 소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보면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면 세상 것은 얻을 수 있는지 모르나 영원한 만족과 행복은 얻지 못합니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땐 나는 만족 하였네..."라는 가사처럼 하나님을 바라면 참 만족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릴 만족과 행복도 여호와 앞에서만 영원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시작됐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 날, 첫 주일입니다. 오늘 이후로 마음에 새로운 모습을 담고 사십시다. 겸손하게 삽시다. 욕심을 버립시다. 평안을 누리며 삽시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만 바라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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