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말씀과 생활

갈라디아서 강해6

관리자 2017.09.16 17:46 조회 수 : 43

Add movie file / 동영상 추가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3:1-5      "듣고 믿을 때에"

 

    2장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논쟁을 벌인 내용을 중심으로 과연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 율법의 힘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듣고 믿은 믿음에서냐에 대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설명을 했었다. 이제 3장에서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책망하기에 이른다. 바울이 이제까지 전했던 복음은 믿음을 통한 구원에 관한 것이었지 결코 율법의 행위나 할례 또는 음식과 절기를 지키는 장로의 유전에 있지 않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3:1-5 "듣고 믿음으로"
    3:1  바울은 변질된 복음으로 교회에 혼란을 야기시킨 이들과 자신의 논쟁을 끝낸 후에 화살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돌린다. 3장의 첫마디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라는 한탄의 외침이다. 이는 그토록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하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함을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잘못된 복음에 유혹되어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잊으려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만일 이 편지가 주후 50년경에 쓰여 졌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이 불과 17년전의 일이다. 그 지경에 살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사건에 대해서 모를리 없다. 이처럼 이 일이 아직까지도 기억속에 생생한데 그것을 잊고 잘못된 말에 현혹 되었느냐고 책망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인데 그 사랑을 벌써 잊어 버렸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그리스도는 갈라디아 성도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되었고, 십자가의 체험이 이제는 곧 갈라디아 성도들의 체험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그 십자가의 고난을 잊으려 하느냐는 간절한 바울의 호소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기서 "누구"는 1장 7절과 2장 12절의 "어떤 사람들"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들이 어떤 말로 꾀었는가? 사도행전 15장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듯이 한결같이 이들의 주장은 율법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결단코 구원함을 얻을 수 없으므로, 혹 율법과 관계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완전한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1장 8-9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바울 자신을 비롯한 그 누구라도, 설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전한 복음외에 변질된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는 선언이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통분히 여기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체험이 아직까지도 그들 심령속에 생생하게 살아 남아 있는데, 그러한 거짓 유혹에 빠져서 참 복음을 변질케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가슴을 치고 애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바울의 결심에 찬 아주 심각한 질문의 장면이 여기에 나오고 있다. 바울의 심정은 비록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러한 거짓 유혹에 빠졌다 하자"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지 갈라디아 성도들을 영원히 지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바울 자신은 믿고 있는데 하나만 물어보자는 것이다.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영어 성경 NASB 에서는 "to find out from you-직역-너희로부터 찾고자 한다"라고 번역해 놓은 반면 NIV에서는 "to learn just one thing from you-직역-너희로부터 한가지 배우(고자)려한다"로 번역해 놓고 있다. 이 번역에서는 한글 성경이나 NASB 보다 NIV가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하고 있는데, 원문은 "τουτο(this) μονον(only)  θελω(I desire) μαθειν(to learn) αφ(from) υμων('humwn'-you)"-"너희로부터 한가지 배우기를(알기를) 소망한다" 로 직역될 수 있다. 즉 "너희들이 그토록 쉽게 거짓 복음을 따라 사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도 좀 배워보자"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는 바울이 실질적으로 배워 보려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복음에 어떻게 하면 그토록 쉽게 현혹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통분한 마음의 표현을 이처럼 나타낸 것이고, 설사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이 거짓 유혹에 잠시 잠간 미혹 되었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가르침과 복음의 진리를 아직 간직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의도적 표현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또한 바울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성령 받은 것을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지,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알고 있는지 그것을 알고자 또는 확인하고픈 마음에서 나온 표현으로 본다.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언급한 바가 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해 주고 죄를 지적해 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 전부이지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고전 15:56, 갈 2:19, 롬 7:7-25). 그렇다면 답변은 명확해진다. 성령을 받은(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다(성령과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필요).

 

    3:3  이와 같이 당연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혹되었으니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는 예수를 알지 못하여 육체와 더불어 육신적 삶을 살아 왔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영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과거의 육신적 삶으로 되돌아 가려느냐고 바울은 한탄하고 있다.

 

     κατα  σαρκα            εσχατον(εσχατοs-목적격단수-마지막, 최후)
      (σαρξ-육체)              κατα  πνευμα    (고후 5:17)

 

     (고후 5:15,17)                                    갈 3:5

 

    바울은 육체에 대하여 이제는 죽은 자가 되었다고 간증한 바가 있다. 2장 20절에서 바울의 고백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였는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로는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 자신을 버리고 이제는 자신 안에 바울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영적인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갈라디아 성도들도 십자가의 체험을 통해 이제는 육적인 삶을 사는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삶을 사는 영의 사람이 되었는데, 이제 또 다시 율법을 준수함으로 육적인 사람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라고 바울은 통분해 한다.

 

    너희가 새 삶을 살고 있으면서 (from κατα σαρκα  to κατα πνευμα)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려느냐 (from κατα πνευμα  to κατα σαρκα).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으니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는 믿음 없는 자의 소치라고 책망한다.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어떤 고난을 갈라디아 성도들이 받았는가? 본 절에서 말하고 있는 괴로움은 갈라디아 교회에만 국한된 핍박이 아니다. 초대 교회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예외없이 자기 민족으로부터 또 로마 제국으로 부터 핍박을 받으며 생존해 왔다. 그러한 핍박이 무엇으로 인해, 왜 온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다시오실 메시아로 믿는 믿음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와 같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핍박을 견뎌오면서 살아 왔는데, 이것을 다 던져 버리고 거짓 복음을 받아 들임으로 할례당인 유대 교인으로 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행위는 결단코 복음안에서 용납되어 질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주장하는대로 율법을 통해서만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 질 수 있다면 자신들이 이제까지 받아온 괴로움은 헛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과연 이제까지 헛것을 믿어 왔으며 우리가 받은 모든 고난들이 헛된 것이었느냐고 반문한다.

 

    3:5  만일 우리가 받은 고난이 헛것이라면 다시 묻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고 따르는 그 믿음에 의해서냐" 는 것이다. 답은 당연히 "우리가 들은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 주셨다" 이다.

 

    2절과 5절은 서로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는데  두 가지 다른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2절 말씀은 성령을 받은 것에 중점을 둔 반면에 5절에서는 "누가 성령을 주시는 자시냐"와   "무엇을 근거로 성령을 주셨느냐"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 2절 말씀은 ελαβετε(aor.act.ind.-과거 능동태 직설법-λαμβανω)-did you receive 라는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5절에서는 επιχορηγων(pre. act. part.-현재 능동태 분사-επιχορηγεω)-to supply 라는 현재형 단어를 쓰고 있다. 이는 곧 2절에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성령 체험을 했는데, 그 체험이 과거의 체험으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성령을 보내 주시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의 경험을 이제는 과거의 체험으로 돌리고 있느냐는 암시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성령세례는 단일성, 성령충만은 지속성).

 

    NIV 성경에서는 ο(ho-He) ουν(then) επιχορηγων(supplying) υμιν('humin'-to you) 문장에서 관사 ο(ho)-"그가 너에게 (그 성령을-το Πνευμα)공급하다"-를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14장 16절을 근거로 성령을 보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어법상 ο(ho) 와 το Πνευμα 를 동격으로 쓰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따라서 "하나님이 그 성령을 또는 그의 성령을 주신것은" 율법의 행위로 주신 것이냐 아니면 듣고 믿은 그 믿음으로 주신 것이냐는 질문을 끝으로 1절로 5절까지의 말씀을 맺고 있다. 답은 당연히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주어진 보혜사 성령이다. 

번호 제목 날짜
25 갈라디아서 강해8 2017.10.14
24 갈라디아서 강해7 2017.09.23
» 갈라디아서 강해6 2017.09.16
22 갈라디아서 강해5 2017.08.26
21 갈라디아서 강해4 2017.08.19
20 갈라디아서 강해3 2017.08.12
19 갈라디아서 강해2 2017.08.05
18 갈라디아서 강해1 2017.07.29
17 히브리서 강해 1 2017.02.15
16 히브리서 강해 2 2017.02.15
15 히브리서 강해 3 2017.02.15
14 히브리서 강해 4 2017.02.15
13 히브리서 강해 5 2017.02.15
12 히브리서 강해 6 2017.02.15
11 히브리서 강해 7 2017.02.15
10 히브리서 강해 8 2017.02.15
9 히브리서 강해 9 2017.02.15
8 히브리서 강해 10 2017.02.15
7 히브리서 강해 11 2017.02.15
6 히브리서 강해 12 2017.02.15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