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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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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태복음 17:14-16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던 예수님의 일행은 하룻밤을 산에서 기도하며 보내시고 그 이튿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큰 무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질병에 걸린 자기의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간질 발작이 오면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져 아이가 심히 고생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먼저 주님의 제자들에게 아이를 보였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히 자기 아들을 고치지 못했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질병으로 신음하는 인생들의 모습과 그들을 향한 교회의 사명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무엇보다도 교회는 산 아래 세상의 실상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1) 세상은 죄로부터 오는 육체의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질병은 인생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만듭니다. 의학이 발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은 근절되기는커녕 불치의 질병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병원에라도 가게 되면 수 많은 병자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세상이 다 병자처럼 보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직도 정복되지 않고 있는 많은 질병들이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에이즈라는 새로운 공포의 질병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페스트"에 비유되는 이 질병은 현대인들의 성의 문란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천형의 병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거나 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씀인데 질병이 죄에서 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질병을 죄에 대해서 연관시켜 생각할 때 개인적인 죄가 없다 하여도 근원적인 의미에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세상에는 질병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죽음도 질병도 결국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결과로 주어진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죄는 마음의 평정을 잃게 하고, 마음이 평정을 잃으면 질병에 걸린다는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지와 조심성의 결여가 질병 파급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생각해 보면 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육체의 건강은 건강한 마음, 건강한 심령에서 얻어집니다.

 

    2) 그 어떤 질병보다도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정상적인 사람보다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더 많은 듯 보입니다. 현대인의 정신적 질환은 세 가지의 주의 또는 사상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데, 그것은 물질 만능 주의 혹은 사상과, 권력 지상주의, 그리고 육체 쾌락주의입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1) 칼 막스는 이 세상을 "물질"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에 의하여 그 삶이 좌우된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물질 만능 사상은 현대인의 정신을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물질이 인간의 척도가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질적 소유의 정도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악한 사상은 인간을 물질화시킴으로써 비인간화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이 니이체인데, (2) 니이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최고의 가치로 규정했습니다. 이 사상은 "힘"이라고 하는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사상을 통해서 권력은 모든 가치의 우위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정치가 현대인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정치를 위해서는 모든 물리적인 힘이 거침없이 동원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면 해결 못할 문제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정치적으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권력의 우상은 독재와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지배자의 전단에 의하여 행해지는 전제 정치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정치적 도구로 만듦으로써 비인간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을 성적 존재로 보고 인간의 생명 활동은 모두 이 성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상은 현대인을 성의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대지"의 저자 펄벅은 오늘의 미국의 부부는 다만 "성의 동반자"로서의 의미 밖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의 자유, 성의 개방 사상은 간통과 동성애를 합법화시켰고, 임신 중절로 일컬어지는 "살인행위"를 합법화 하고, 미혼모, 기아, 독신주의 등의 사회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물질 혹은 부와, 힘 혹은 권력과, 성 또는 쾌락은 현대의 3대 우상이며 현대인은 이 세 우상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기계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 이 시대의 모든 인간들이 다 악한 영에 유혹을 받거나 사로잡혀 정신적 질환으로 앓고 있는 환자들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누군가가 표현한것처럼 세상이 미쳐가고 있습니다.

 

2. 이런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1)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자들이 간질병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듯 현대 교회는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세상을 고치지 못하는 무능함 속에 빠져 있는 현실임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니까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라고 아이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라고 하는 이 사람의 말은 바로 현대 교회의 무능을 찌르고 있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현대 교회가 왜 이와 같은 질병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능력을 상실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 자체가 이와 같은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의 힘이 교회를 지배하고, 봉사자와 헌신자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현실이고, 십자가의 고등 윤리 신앙이 세속적 음란 문화에 휘말려 있습니다. 교회 자체가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간질병을 치료할 능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무능은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이 가져온 불행한 결과입니다.

 

    2)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교회의 임무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산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 인간들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기가 좋아 오니 여기 초막 셋을 짓고 삽시다"라고 말한 베드로의 말에 대해 우리는 세상으로 내려가자 하셨습니다. 교회는 산속에서 안일하게 유유자작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물질에 취해서 "여기가 좋아오니 복잡한 세상 간섭하지 말고 여기다 우리의 안식처를 만들고 삽시다" 하는 현실 안주 신앙이 교회를 병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세상은 물질 만능의 중병, 권력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중병과, 쾌락주의라고 하는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세상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교회가 이들과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이들을 치유해야 할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할 수 있는 이 치유 능력은 세상에서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화 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질 만능주의, 권력 지상주의, 쾌락주의를 몰아내고 말씀이 지배하는 교회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기도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못할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고,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하여 중병에 신음하는 세상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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