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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생활

히브리서 강해 15

관리자 2017.02.15 17:11 조회 수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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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활 속에 반영되는 실천적 신앙 11-13장

 

1) 믿음의 정의와 실 예들 11:1-40
    (1) 신앙의 본질 11:1-3

1-2절:
    본 절을 통해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고 있는 신앙을 시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면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말에 대해서는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이해할 수 있고, (2)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란 표현은 현재에 대한 감각적인 시각적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3) 믿음에 대해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는 말은 선지자들의 과거에 체험한 경험을 증거로 삼는 말씀으로 해석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차원으로 생각하면 신앙은 미래에 대하여 실상이 되고 현재에 대하여 증거가 되며 과거에 대하여 역사적 실증이 된다.

 

3절:
    만물이 태초에 창조될 때에 모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 곧 [혼돈]이나 [공허]나 [흑암]으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하지 않고 다만 나타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말미암아 창조되었다(창1:1-5, 요1:1-3). 다시 말하자면 눈에 보이고 빛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다 보이지 아니하는 [말씀]에서 나타나게 되었은즉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그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알게 된다는 의미다.

 

    (2) 신앙의 특징 11:4-12

4절:
    창세기 4장에 있는 가인과 아벨 형제의 제사 드린 것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데 학자들간에 아벨은 희생으로 제사하였고 가인은 제 마음대로 손에 있는 농산물을 드린 까닭에 피의 제사였던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으나 그렇지 못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는 기준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아벨은 하나님의 시키시는 법도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제사를 드렸기에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음으로 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되었다. 

 

5-6절:
    창세기 5장 21-27절에 근거를 둔 말씀으로 에녹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들리어서 하늘로 옮겨진 것이었다. 즉 에녹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에녹과 같이 (1)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2) 하나님의 [계신 것과] (3)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자이심을 믿는 자라야 (4)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7절:
    창세기 6장으로 9장까지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에 대한 사건을 가지고 믿음으로 [아직 보지 못하는]미래에 될 일을 [경고하심을 받아] 미리 내다볼 수 있다고 말하였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꼭 그대로 될 줄로 믿는 데서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방주의 모양을 살펴볼 것 같으면 장방형으로 생겼다 했으니 네모 모양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노도 닻도 없는 배로서 오직 하나님께 그 생명이 맡겨져 있음을 상징한다. 노아는 이와 같은 배를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구원함을 얻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한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되었다.

 

8-10절:
    창세기 11장 이하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약속을 받아 기업을 얻었는데,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았고, 그 기업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말씀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기업이나 부르심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은혜의 결과다.

 

11-12절:
    사라의 나이가 많아지고 남편 아브라함 역시 백 살이 다 되어 아들 이삭을 낳은 것은 인간의 보통 생산력으로 된 일이 아니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된 일이라고 증거하였다. 더욱 독자 이삭으로 말미암아 자손이 많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는데, 이는 그 수효가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번성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약속을 믿는 데서 이루어진 기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생산력은 오직 하나님을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는 신앙에서 난 것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신앙의 목표 11:13-16

13절:
    [이 사람들]은 위에 말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과 같은 선진들을 가리킨 말씀이다. 그러나 그이들은 신령한 부르심이나 장래의 기업이나 약속을 받은 것뿐이요 실질적으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 가나안의 기업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고 기뻐하였으나 실상적으로 자기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말하였다(엡2:19, 창23:4, 47:9).

 

14-15절:
    우리도 안개와 같이 잠깐있다가 없어질 것이요(약4:14) 하루살이처럼 삶의 기간이 얼마 되지 못하는 인간인줄로 알아야 한다. 선진들의 동경하는 고향은 땅 위에 있는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 아니었고 하늘 위에 있는 영원한 예루살렘임을 보인 것이었다(계21장-22장). 아브라함이 만일 자기의 고향이라고 할만한 하란이나 자기 부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고향이라고 사모하였더면 그리로 [돌아갈 기회가]언제든지 있었다.

 

16절: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리고 가지 아니하고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약속으로 받은 가나안복지를 향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갔던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과 시온산이 그의 사모하는 참 고향이었던 것임을 나타낸 말씀인데, 성도들은 이 세상은 주마등과 같이 지나가고 자기는 그 중에 처하는 나그네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아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다(히13:8).


    (4) 신앙의 역사적 실예 11:17-38

17-19절:
    본 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곧 독자 이삭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한(창22장) 역사를 들어 그 위대한 신앙을 증거하였다. [아브라함은 시험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림으로 약속을 받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이나, 욥을 시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몰라서 아시고자 시험한 것이 아니다. 시험을 당해도 아브라함이나 욥이 넉넉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을 것을 아셨지만 시험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이나 욥으로 하여금 연단을 받아 정금같은 귀한 믿음을 완성하게 하는 동시에 세상에 귀한 모범을 보이게 하신 것이다.

 

20-21절:
    이삭이 아들 에서와 야곱에게 축복한 사실과(창27장)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한 것을(창48장) 가지고 신앙의 증거로 들었다. 옛날에 부모가 자손에게 축복하는 것은 노아 때부터 성경에 나타난다. 이 축복에 대하여서는 인간심리 현상으로 보아 인간생활에 있어서 축복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주는 것이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받는 것이다(히7:7). 축복은 하나님의 뜻에서 인간에게 맡기신 유업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의 예배에서 행하는 축복도 하나님의 시범이요 그리스도의 시범이며 사도들과 바울과 주의 종들의 시범이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는 사람은 축복자의 축복을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

 

    야곱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70인역문이 아닌 히브리원문에는 [침상머리에서 경배하였다]고 되어있는데(창47:31) 70인 번역에는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고(히11:21) 되어있다. 성경학자들은 히브리어의 침상이란 말과 지팡이란 말의 어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70인 번역에서 잘못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침상이든지 지팡이든지 몸을 자유스럽게 쓰지 못하는 노년의 야곱의 태도를 나타내는 말로 경건한 노인이 자손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축복한 것으로 보면 아무 변함이 없다.

 

22절:
    요셉의 유언에 관하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놓여 나 하나님의 약속하셨던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것을 말한 것으로 창세기 50장 47절에 기록된 대로 인용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의심없이 믿는 데서 난 것을 가리킴이다.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한 것]은 창세기 50장 25절에 있는 말씀으로 이스라엘인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미리 약속하신 가나안복지로 돌아갈 것을 확신하는 이상에 자기의 시체도 애굽에 묻히지 아니하고 자기의 자손들이 사는 가나안 땅에 묻으라고 유언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나는 날은 분주하고 급박한 날이었지마는 유언을 잊지 아니하고 요셉의 해골을 파가지고 떠나갔다(출13:19). 모세를 이어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요셉의 자손들이 자기네 분깃으로 받은 땅에다가 요셉의 해골을 장례하였다(수24:32). 이것은 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중히 여기고 확실히 믿어 의심하지 아니한 표적으로 볼 수있다.

 

23절:
    자식을 낳은 부모의 눈에 [아름다운 아이]로 보이지 않을 아이가 어디있으리요 마는 장차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아이 모세는 그 부모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참으로 아름다운 아이였다. 석 달을 숨겨 길렀으나 바로의 명령이 엄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아이를 나일강에 던지기로 하고 그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상자에 담아 나일강가에 있는 갈밭에 던지고 멀리서 망을 보고 있었다.

 

24절:
    마침 바로의 공주가 시녀들을 데리고 목욕을 나왔다가 갈밭에서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가 나는 상자를 발견하고 히브리 여인의 낳은 아이로 짐작하였으나 자기가 나이 높도록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물에서 건져 냈다는 기념으로 아기의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유모를 찾는 중에 미리암의 소개로 모세는 에굽 공주의 양자로 생모의 젖을 먹으며 자라게 되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장성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일꾼으로 서게 된다.

 

25-26절:
    애굽 공주는 남의 낳은 아들을 양자 삼아 제 아들을 만들고자 하였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심정을 받았다. 모세의 받은 이 이스라엘인으로서의 애국심, 애족심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고 하는 말씀으로 모세의 믿음을 칭찬하였는데, 이와 같이 모세가 낙을 버리고 고난을 선택한 것은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다.

 

27-29절:
    모세가 애굽의 왕궁에 더 머무를 수 없이 미디안 목자의 집으로 피하여 40년간이나 피신한 것이든지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방황하기를 또 40년간이나 한 것이 다 [믿음으로] 좇아 되어진 일들이다. 모세는 유월절의 피를 뿌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못을 박히시고 피를 흘리신데 대하여 예표가 되었고, 그림자가 되고, 모형이 되는 구약의 첫 언약을 세웠다. 모세는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백성의 인도자요 중보자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예수의 그림자됨을 얻었다.

 

30-31절:
    가나안의 정복 전쟁사에서 첫 관문과 같았던 여리고 전쟁에서 [믿음으로]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 당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이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의 조상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 조상이 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수2장, 6장).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라는 표현은 히브리서 기자의 심정을 말하고 있는데, 즉 더 이상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호수아 이후에 사사시대를 지나 이스라엘 왕국시대까지의 역사적 사실로 말하면 그 경로가 대략 이러한데, [기드온]-사사였으며, 미디안 압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 [바락]-장군으로 여사사 드보라를 도와 가나안 왕을 쳐서 이김, [삼손]-사사였으며 블레셋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 [입다]-역시 사사였으며 암몬을 쳐서 이김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사무엘]-사사요 제사장이었는데, 이스라엘을 지도하고 왕을 세움, [다윗]-이스라엘의 제 2대 왕으로 왕국을 번성케 한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고있는 인물이며, [선지자들]-예언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자들로서 백성들을 지도하고 교훈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33-38절: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는 (1) 가나안을 이기고(삿4-5장), (2) 미디안을 이겼으며(삿6-8장), (3)암몬을 이겼고(삿11-12장), (4) 블레셋을 이긴 것(삿13-16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를 행하기도 하며]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동족을 돕는(삼상12:4, 삼하8:15, 대상18:14, 대하9:8) 등의 행위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약속을 받기도 하며]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하신 언약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왕위가 계속될 것에 대한 약속과 같은 것(삼하7:11-12)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며]는 (1) 삼손에게(삿14:6), (2) 다윗에게(삼상17:34-36), (3) 다니엘에게(단616-23) 일어났던 사건들로 이해할 수 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는 느브갓네살 왕의 통치 기간 중에 정금 같은 신앙의 모습으로 불 가운데서 건짐을 받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예로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는 바로의 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모세가 있고(출18:4),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게 하사 구원하신 다윗(삼상18:11, 19:10, 시144:10)등의 구원의 사건들로 이해할 수 있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강하게 하셨고, 전쟁에서도 이기게 하심으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삿16:28-31).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는 (1) 사렙다 과부의 예를 생각할 수 있고(왕상17:8-24), 수넴 여인의 사건을 생각하게 한다(왕하4:18-37).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또한 복음을 위해 죽음의 길을 갔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과 성도들, 그리고 신약이후의 순교자들의 불굴의 신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희롱...채찍질...결박...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으며]는 신앙으로 인해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 또한 걸어가는 수 많은 신앙의 순례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는 나봇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고(왕상21:11-16), 제사장 스가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대하24:20-22), 외전 이사야 승천기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가 므낫세 왕 때에 나무로 만든 톱에 킴을 당해 죽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는 사실 많은 선지자들이 시험을 당하고 칼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것을 말씀을 통해 기억할 수 있게 하는데(왕상19:10), 그중 여호야김 왕이 칼로 죽인 우리야가 그 실예가 된다. 우리야는 기럇 여아림 스마야의 아들인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을 했다가 여호야김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렘26:23).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는 말씀의 상황을 엘리야의 생애를 통해 찾아볼 수 있고(왕하1:8, 슥13:4), 또한 수 많은 선지자들이 이와 유사한 삶을 살다가 갔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했으니 즉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했듯이 엘리야나 침례 요한 등 복음으로 인해 핍박을 받으며 고난의 길을 가야했던 선지자들의 생활양식 그 모습이다.

 

    (5) 신앙의 완성 11:39-40

39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즉 신앙의 선조들이 이와 같이 믿음으로 증거를 받기는 했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구약의 위인들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비하면 예표와 그림자와 모형일 뿐이므로 약속을 받지 못한 점에서 신약의 복음 진리아래 있는 성도만 같지 못하다는 의미인데, 따라서 주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위인들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마11:11, 12:38-42).

 

40절:
    [이는] 앞 절에서 말하고 믿음의 선조들에 대해서 이처럼 표현한 것인데,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를 위하여]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아래 있는 성도들을 말함이요,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말씀은 더 좋은 언약으로 세우신 더 좋은 중보자이신(히8:6)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좋은 제물을 가지고(히10:1-7) 더 좋은 제사를 드림으로(히10:8-18) 더 좋은 세계를 준비하셨다(히10:19-25)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신 속죄제로 말미암아 구약의 족장들과 선지자들의 사업도 다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에서 된 일이기 때문에 결코 사람이 무엇을 자랑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것이다(고전1: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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