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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8/6/24 성도라는 이름으로

관리자 2018.06.23 22:01 조회 수 :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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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태복음 5:1-48(14-17)

    요즘 시대는 유행에 민감합니다. 어느 유명 연예인이나, 유명한 인사가 어떤 가방을 들었더라 하면 너도 나도 그 가방을 구입하려 합니다. 어떤 옷을 입었더라 하면 그 디자인의 옷이 품절되고 맙니다. TV에 나오는 젊은 여자 연예인들을 보면 그 얼굴이 그 얼굴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성형을 하다 보니 얼굴 형태도 개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인간, 성도다운 성도, 요즘 세상은 인간다운 인간을 원하며, 요즘 교회는 성도다운 성도를 원합니다. 성도인데 성도가 아닌 듯 보이는 것은 제 눈에만 보이는 착시 현상은 아닐겁니다.과연 누가 예수를 잘 믿는 것일까요? 어떤 성도가 예수를 바르게 믿는 것일까요? 봉사잘하고, 헌금 잘한다고 잘 믿고, 바르게 믿는 것일까요? "내 아버지의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갈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1.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됩시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 또는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지켜야 할 헌장이기도 합니다. 산상보훈은 복있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제일 먼저 가르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온유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비난을 다 받는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행복의 기준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모든 것을 갖고 누리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어쩌면 저들은 행복하겠지" 합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대한항공 조회장의 부인이 있습니다. 이미 언론에서 공개되, 그가 보인 추한 동영상 안 본 사람 거의 없을 겁니다. 겉모습은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실상을 동영상을 통해 보니, 그리 행복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분노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회장 부인이라 하는 사람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설이 절제없이 쏱아져 나오는거 다 보셨잖습니까? 대조적으로 언젠가 TV화면에 비췬 아주 행복해 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사람은 지체장애자를 돌보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하다 말합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마음이 가난한 사람, 어떤 의미로는 욕심부리지 않는 마음일겁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더 선하게 살지 못해 안타까와 하는 마음, 더 도우며 살지 못해 애통해 하는 마음이 행복한 생활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이나 잣대로 보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행복할 수 있는 성도들이 진짜 예수 잘 믿는 성도요,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참으로 복된 성도들일 것입니다. 그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세상의 소금과 빛된 삶을 삽시다.
    소금과 빛은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것들입니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소금은 자기를 녹여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하나의 초가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그 몸을 태워야 합니다. 소금이 방어적이며 수동적인 역할이라면, 빛은 공격적이며 능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히고 어두운 구석구석을 찾아 밝히 드러나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어야 한다는 이 명령은 어두운 이 세상, 맛을 잃어버리고 부패한 이 세상에 너무나도 적절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전해주신 말씀의 근본적 의미는 이와같은 말씀을 들었으면, 선하게 사는 방법을 배웠으면 그렇게 실천하며 살라는데 있습니다. 누가 예수를 가장 잘 믿는 사람입니까? 누가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구제가 무엇이며, 용서가 무엇이며,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웠으면 그것을 생활속에서 실천하며 사는 성도가 예수 잘 믿는 성도입니다. 학교만 왔다 갔다한다고 해서 다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닌것처럼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예수 잘 믿는 것 아닙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기 희생이 있어야 바르게 예수 믿는 성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는 말씀이고, 창조력이 있는 능력의 말씀이고, 사람들을 새 사람 되게 하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는 것이 기적중의 기적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어떻게 아직도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옛 모습의 추한 냄새만을 풍기며 살 수 있을까요? 그 심령안에 예수가 없어서 그런겁니다. 교회는 다니나 예수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겁니다.

 

3.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옛 사람은......그러나 나는" 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여섯 가지의 반명제(Antitheses)는 철저윤리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성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혼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보복하라,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하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철저한 명령이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한 것은 모세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주님이 오신 목적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는 길, 또는 완성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율법을 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는 걸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것이었을까요? 만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을 "완전케 한다"는 말의 뜻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복음은 더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가 되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우리 인생들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옛 사람의 법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완성시키셨습니다. 법 형식에 매여 있는 법 정신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심으로써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법이 존재하는 근본 목적이 형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법의 본질적 의미를 상실한 겁니다. 법은 선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하는 목적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도 잘잘못을 따지고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실천에 본질적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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