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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8/5/27 부모와 자녀

관리자 2018.06.20 21:17 조회 수 :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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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태복음 15:21-28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근처 동네인 게네사렛(가버나움, 막달라등이 모두 이 지역에 속하는 성읍들-갈릴리 바다를 게네사렛 호수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음)에 들어가셨을 때 예루살렘으로 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장로의 유전에 대한 질문을 받고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형식에 치우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의 위선된 신앙을 지적하시며, 신앙이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신 주님은 그 장소를 떠나 바닷가(지중해) 지역에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게 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한 이방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흉악히"란 말은 헬라어의 "카코스"라는 단어에서 온 말인데, "위험할 만큼 해로운"이라는 뜻으로 병세가 매우 심각한 상태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부모와 자녀간의 의무, 책임, 또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인 5월의 마지막 주일에 이 말씀을 근거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눔으로 하나님의 주시는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1. 문제가 생긴 딸과 그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가나안 여인이 고통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도움을 청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끼고 사랑하며 귀엽게 자라나던 딸에게 문제가 생김으로 딸은 어머니의 고민대상이 되었습니다. 딸의 문제요, 불행이 곧 어머니의 문제요, 불행이 된겁니다.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곧 부모들의 것입니다.

 

    자녀의 고통을 지켜보는 부모는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늘 함께 하고자 합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부모들은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안고 일생을 살아갑니다. 해서 자녀들의 고통은 부모의 고통이 되는 것이고, 자녀의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가 됩니다. 즉 자녀들의 모든 문제와 고통을 부모님들은 부모의 사랑과 연대화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나 오늘이나 부모들은 자녀의 문제와 고통을 자신들의 것으로 여겨 괴로워하며 자식을 키웁니다. 그럼에도 현대를 살고 있는 수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싫어하고 모시지 않으려 하며 귀찮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혹여 부모를 모시고 있다고 하더라도 은혜를 모르고 기쁨도 없이 부담스럽게만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효도가 아닌, 단순한 부양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어쩔 수 없는 동거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2. 딸로 인하여 온갖 수모를 당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실제 세기적인 절망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민과 고통을 안고 주님께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으니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큰 소리로 애원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묵묵부답으로 침묵을 지키시며 그냥 행보만 진행하셨습니다. 여기에다 주님의 제자들까지 "이 여자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하며 여인이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으며 방해했습니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보내소서"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쫓아 보내시죠'라는 의미입니다. 즉, '씨끄럽게 하는 이방여인이니 쫓아 버리십시다'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소란스러우니 얼른 고쳐서 가게 하시죠'라는 의미인데, 이 또한 연민의 정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귀찮게 하고 있으니 얼른 고쳐 보냅시다'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마지못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입을 여신 예수님 조차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라고 하시며 그녀를 은총의 대상에서 제외된 자로 규정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으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라고 가나안 여인을 간접적으로 개 취급을 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딸 문제 때문에 당한 수모는 형언할 수 없는 수치, 모멸감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왜 이렇게 굴욕적인 대우를 받아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단 한가지, 귀신 들린 딸이 자신의 딸이요,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였기 때문이고, 아이를 고치기 위한 일념으로 주님을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한 길이라면 모성애는 어머니로 하여금 그 어떠한 것도 감수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부모님들의 모습입니다.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자석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수업을 재미있게 유도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M자로 시작하고 여섯 글자로 되어 있으며,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퀴즈를 냈습니다. 학생들은 한결같이 모두 다 'Mother' 어머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허나 선생님이 바라던 대답은 '자석' 곧 'Magnet'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것은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어머니라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링컨(A. Lincoln)은 '현재의 나와 앞으로의 희망하는 것 모두가  천사와 같은 내 어머니의 덕택이다'라고 했고, 무디(D.L. Moody)는 '일생동안 내가 해낸 모든 것들은 어머니가 아니었더면 불가능했을 것이다'고 했으며, 나폴레옹(B. Napoleon)은 '프랑스에 필요한 것은 어머니다'라고 했습니다. 벤자민 웨스트(B. West)는 '어머니의 키스가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사회의 미래는 어머니, 즉 부모님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의 대명사는 자녀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행과 불조심은 반드시 미리 해야 한다'는 일본 속담이 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애 달파 하는 것이나 다 불타 버린 다음의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것일 뿐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 부모님의 사랑임을 이야기 합니다.
    본문 말씀 속에 깊숙이 묻혀 있는 보화는 여인이 바른 길을 찾았다는데 있습니다. 즉 본문의 핵심은 기적적인 치료라고 하는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른 길 되신 주님을 찾아 나왔다는데 말씀의 본질이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치욕적인 수모와 멸시, 더 나아가 머리를 들고 설 수 없는 굴욕적인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자기가 찾은 바른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귀신 들린 딸에 대한 자신의 애절한 간구가 무시되고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위축되거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딸 때문에 당한 고초, 고통, 수모는 마침내 그녀의 딸을 깨끗하게 고침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본문 25절에서 사용된 '절하며'란 헬라어의 '프로세퀴네이'라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 쓰여졌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가나안 여인이 엄청난 멸시 속에서도 "계속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여인은 예수님만을 자신의 진정한 고백의 대상으로 믿고 있었고 진리에 대한 바른 눈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발 앞에 주님의 응답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엎드려 있었던 것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27절에서 이 가나안 여인은 최후의 승부수를 띄웁니다. 이는 주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은혜의 구원에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제외된다라고 하는 사실은 단호히 거절하는 항변의 일성입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은혜의 부스러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절대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 신앙만이 외면당하는 것 같아도 외면 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시는 은총의 말씀이 떨어진지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부스러기나 받아야 할, 아니 그것조차도 받지 못할 것 같은 여인이 온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받은 축복의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절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셨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침묵과 거절 속에 숨어 있는 축복을 끌어내어 내 것이 되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힘써 간구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표현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심장이 뛰는 소리입니다. 신앙생활의 실행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선용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간구하는 자들의 흥망성쇠가 믿음의 강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봅니다. 가나안 여인의 모성애는 이방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했습니다.

 

    부모된 성도님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자녀를 사랑한다면 모든 복의 근원이 되는 신앙을 심어 주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녀들이라면, 진정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주께 하듯 그 사랑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 신앙의 주체요, 사랑의 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이제 그 마지막 주일입니다. 5월이 다 지나가기 전에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인식하여 복된 가정, 기쁨이 넘치는 가정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혹여라도 부모와 자녀간에 마음 불편한 일들이 있습니까? 5월이 다가기 전에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중요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행복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가정들이 되시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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