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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8/6/3 은혜의 삶을 삽시다

관리자 2018.06.20 21:19 조회 수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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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야고보서 4:10-17

 

    후안 카를로스의 "제자입니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누가 제자일까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교회다닌다고 해서 누구나가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때에도 예수님을 따르며 성전에서 또 산과 들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눈으로 목격했지만 그들이 전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중 대다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자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외형적인 조건만 보며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군중심리에 이끌려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심령에 만나고 모셔들이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체험이 없이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름뿐인 제자는 누구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제자됨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외형적으로만, 또 국적상으로만 한국인이라고 해서 진정한 한국인이라고 말 할 수 없고, 그 마음속에 한국인의 얼을 담고, 국민의 의무를 잘 이행해야 진정한 한국인이 되듯이, 예수의 사랑과 형상을 마음속에 담고, 주시는 말씀대로 사는 행위가 동반된 성도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가 금해야 할것과 또한 마땅히 행해야 할것에 대해서 누차에 걸쳐서 강조하며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을 받아 들일만한 마음의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축복의 말씀이 도리어 화가 되는 법이고, 생명의 말씀이 도리어 멸망의 말씀이 되어 버리고 말 겁니다. 본문에서 성경은 비방과 이생의 자랑의 무익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암시적으로 비방과 이생의 자랑의 무익성만을 말씀하심이 아니라, 성도는 마땅히 참다운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비방대신 칭찬이 앞서야 할 것이고, 이생의 자랑대신 말씀의 자랑이 앞서야 할 것이며, 교만대신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오늘 6월의 첫째주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상고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비방대신 칭찬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11-12절).
    4복음서를 읽으면 주님의 책망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죄악시 하는 문둥병으로 고생하던 병자들도 아니며, 강도 살인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말씀을 잘 알고 있다는 바리새인/서기관들/사두개인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외식과 남을 비방,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형제를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말씀을 비방하고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판단하는 자 자신이 율법의 준행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판자가 된다는 뜻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해야 하는 준행자들이지, 누군가를 평가하는 재판자가 아닙니다. 인생들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판단하거나 비방하는 삶이 이와같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진리를 핑계하며 범하기 쉬운 죄악이 비방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판단하에서의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의 진리는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남을 "비방하지 말라"는 겁니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 1절 이하의 말씀에서 주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1-3)고 지적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까지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남을 비방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들보를 깨닫는 겸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청문회에서 많은 국회의원들이 증인들을 자기들의 판단 기준에 마추어서 정죄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증인들을 메몰차게 몰아세우던 의원들은 그러면 티끌만큼의 잘못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말입니까?

 

    성도들의 생활속에는 칭찬이 앞서야 합니다. 잘한 것은 아낌없이 박수처주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주며, 못한 것이 있으면 기도해주고, 안타까와 해주고, 감싸주고, 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성도들이 될 때 이 교회와 사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회 살기좋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성도가 이 일에 먼저 앞장서야 합니다.

 

2. 이생의 자랑대신 복음을 자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13-17절).
    교만은 하나님과 사람 양자가 다 싫어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교만 때문에 범죄하여 낙원에서 쫓겨났듯이 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고 하셨습니다. 인생들이 허탄한 일들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앞세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앞세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과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후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할 때 산으로 피해가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드러나면 항상 숨으시고 감추시고 뒤로 후퇴 하셨습니다. 허탄한 자랑은 악한 죄입니다. 우리가 자랑한다면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건강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강건해야 80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삶은 영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지게 되어있고, 떨어지게 되 있습니다. 지식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것이 더 많습니다.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사람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다른 사람에게는 뭐 그리 엄청난것도 아닌데, 자랑을 합니다. 연예인 만난것을 자랑합니다. 높은사람 만난것을 자랑합니다. 어디 여행 다녀온 것을 자랑합니다. 남편이 어떻고 자랑합니다. 아들이 어떻고 딸이 뭐를 해 주고 자랑합니다. 사위를 자랑하고, 며느리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런 자랑들이 무슨 유익이 있던가요? 그렇게 잘 할 줄만 알았던 자식들이 속을 썩입니다. 최고인줄 알았던 사위가 며느리가 어느 순간 찌르는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믿었던 힘있는 사람이 한 순간 배신을 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의지해 왔던 사람이, 그 사람만큼은 절대 배신할 줄 몰랐던 사람들이, 시간의 터널을 지나면서 변하여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만 자랑하며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자랑하고 전파하며 사는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성도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10절).
   사람이 고치기 어려운 죄가 남을 비방하는 것과 자기를 높이는 교만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이 죄를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이 있습니다.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주님안에 거하여 은혜를 받으면 모든 문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별명이 "우뢰의 아들"이라고 할 만큼 불같은 성격이요, 사마리아인들을 불로 태워 죽이자고 제안했던 사람들입니다(눅9:54). 또한 그들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는 영광을 자기들의 차지로 생각한 탐욕적인 교만에 빠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 난 후에는 변화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변화 되었습니다. 누구나 주 안에서 주님을 높이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겸손의 생활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게 됩니다. 즉 겸손한 성도는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아주 작은 일에도 신경을 써준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남에게 불편함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내 행위나 무감각한 행동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내 맘인데 아무려면 어때 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무뢰한 행동일 수 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심하게 소리내며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남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소리라면 조심하는 것이 성도에게 어울리는 행위입니다. 내가 신고다니는 신발 소리가 너무커서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조심조심 걸을 수 있는 섬세함이 성도가 지닐 마음입니다. 피곤하고 힘들어서 예배 시간에 졸 수도 있겠지만 그 일로 인해서 성도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목회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졸지 않으려고 정신차리고 말씀을 경청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겸손한 생활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는 형식으로 행동에 아무런 제약을 주지 않는다면, 또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비방대신 칭찬하며 사는 성도님들이 되십시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준행자이지, 말씀으로 남을 판단하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이생의 자랑대신 복음을 자랑하며 사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자랑거리는 다 사그러질 날이 있습니다.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돈을 자랑하겠습니까? 젊음을 자랑하겠습니까? 자식이나 부모를 자랑하겠씁니까? 다 언젠가는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을 자랑하며 사는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주님앞에서나 교회안에서 겸손한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축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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