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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8/3/11 너와 나의 신앙고백

관리자 2018.03.10 21:36 조회 수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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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태복음 16:13-20

 

    사람들이 입으로 무엇인가를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에 따라 생각이 정리되고 행동이 정립되기 때문입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신앙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 로마서 10장 10절 말씀을 통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입으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오늘 사회자와 함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면 예수님께서 지난 3년 여의 공생애를 총정리하는 차원에서 작심하신듯 제자들에게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제자들과 함께 지나오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예수님이십니다.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며 복음을 전파하셨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모든 공적 생활을 마무리 하는 단계에 와서 예수님은 함께 거하시며 가르치셨던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또는 누구로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데 관심을 보이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3년 공생애가 제자들을 통하여 제대로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본문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의 입술을 통해 고백되는 신앙표현을 듣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성도님들 자신의 믿음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이 아침에 함께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기독교 윤리 인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인이 되야 합니다.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이때는 주님의 고난이 임박한 무렵이었으므로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실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오신 목적을 십자가상에서 완성시키실 단계만 남겨 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여행 도중에 들은 이야기들 가운데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누구라고 말들을 하고 있는지, 또 제자들 자신들은 이제까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보고 듣고 체험한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다와 갈릴리 지역을 두루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라고 말하더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여기 저기서 들은 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 사람 중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얼마 전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 왔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례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답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회개를 외치며 헤롯 왕과 당당히 겨뤄 신앙의 순교를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던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또 예례미야는 누굽니까?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대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라고 답변을 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 자신이 예수님을 누구로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하든 지금까지 말씀을 듣고, 따르며 눈으로 목격한 예수님에 대해서 제자자신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시인한다고 해서 그 믿음이 신앙고백하지도 않은 여러 성도님들의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도 각자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 하지만, "너희 자신들은 나에 대해서 누구라 말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있느냐"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심각하게 물어오십니다. 이 물음에 어떤 답변이 타당하겠습니까?

 

2.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누구로 생각하고 따랐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이 있을 때에 주저함 없이 앞으로 나서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는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음성이 들리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시고 이처럼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한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십니다.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축복 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되다. 내가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우고, 네게 천국 문 열쇠를 줄 터인데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은 베드로 한 사람의 개인 신앙고백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땅의 온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각 성도님들 입에서 나오는 동일한 고백이 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고백은 자신이 하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지도 않는데,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같은 믿음의 고백은 큰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믿어지지도 않는데 믿습니다 라고 말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의 고백은 축복중의 축복인겁니다. 베드로가 이같은 신앙고백을 했을 때 본문 17절은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베드로 자신이 생각해 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영적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신 은혜의 결과였다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고백하고 싶다고 해서 고백할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의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아무리 내가 믿음의 고백을 하고 싶다고 해도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지고, 나의 구원자로 믿어지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믿으려 해도,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 허다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말씀을 들어도,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성도님들의 입을 통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흘러 나오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사렛 예수를 주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해주는 능력이 됩니다. 아직도 입술을 통해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신다는 사실이 고백되지를 않으십니까? 성령께 우리 마음가운데 감동하셔서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라 고백할 수 있는 믿음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또 다른 흥미로운 사건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비록 예수님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백한 베드로이기는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야 할 길이 어떠한 길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3년 동안 따라 다니며 죽은 자도 살리시고,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보리떡 다섯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적인 사건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손해보는 길을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지금 당장은 초라해 보이지만, 예수님께 초 자연적인 능력이 있으니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필경에 가서 영광의 길이 될 것이고, 틀림없이 뭔가 한자리 얻을 것 같은 생각이 더욱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장차 자신이 받으셔야 할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고난을 예고하셨을 때에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라고  만류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베드로가 예수께서 장차 받으실 고난을 막아섰던 이유는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대가 무너질까봐 그랬다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속마음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은 기대감에 들떠 있던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으로 부터 상상할 수 없는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천국열쇠를 주겠다고 하는 축복까지 하셨던 예수님이시고, 사랑하시던 제자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를 향하여 정색을 하신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자신이 사탄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부정적이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생각을 넣어 준 사탄의 실체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버리는 사람이라야 도리어 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고 하는 "죽어야 사는" 복음의 역설적 법칙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주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을 버릴 때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세상 욕심을 버릴 때 신령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내 자신이 육신의 생각과 정욕과 세상적인 것들을 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인생과 생활속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길입니다.

 

    사무엘 루터포드(Samuel Rutherford)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자신들이 안락한 침대 위에 편안히 누워 있는 채로 천국으로 운반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고난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고난을 받으신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얼마 안있으면 고난주간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주님이 내게 오셔서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누구로 알고 믿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느냐" 물으신다면 주님께 들려 드리는 여러분들의 고백은 어떤 내용이 될 거 같습니까? 모쪼록 우리 성도님들의 입술을 통해 고백되는 말씀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내 생명의 주인이시다!" 외치는 믿음의 고백이 되시기를 살아계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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