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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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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요한복음 6:47-58

 

    본문의 말씀은 육신적인 사고에 젖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 재차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변증적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요한 복음 특유의 변증적 논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요한은 "생명의 떡은 무엇인가?"를 다룬 것이 아니라, "왜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또 믿음의 분깃은 무엇이며,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를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본문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1. 신앙이 무엇인지 그 신앙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47절)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은 현세에서도 영생을 향유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불신 유대인들에게 왜 이와 같은 변증으로 신앙을 촉구하셨는지 이해하려면, 그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1) 유대인들의 세계관은 극단적이었습니다. 외세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인간 역사는 악한 것뿐이다"라는 극단적 역사관에 도달한 유대인들은 그러므로 "인간 세계에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와 같은 극단적인 생각이 그들의 신앙과 결합하여 "그러므로 이 세계는 인간들 손으로 회복시키거나 자의적으로 회복될 가능성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뒤엎으셔서 의와 공평과 평화와 부요가 넘치는 신천신지로 바꿀 수 있다"라는 극단적 종말론을 만들게 됐습니다. 그래서 물리적 권세를 소유한 "인자"와 같은 제 2의 다윗 메시아가 오셔서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해방시켜 물질적 행복과 평화와 승리가 넘치는 이스라엘을 건설할 것을 기대하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볼 때 일개 목수의 아들 인간 예수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니 그들의 극단적 사고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2) 또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 있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페르샤의 이원론적인 우주관을 그리스는 그들의 철학 세계로 접목시켜 체계적으로 정립한 세계관을 가졌는데, 그것이 바로 당시 교회까지 침투한 소위 "영지주의 사상"이었습니다. 역시 세계는 본질과 비본질, 이상과 물질의 두 세계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본질과 이상의 세계는 로고스의 세계요, 선하고 영원한 세계이며, 비 본질의 세계, 물질로 이루어진 이 땅의 세계는 로고스에서 타락한 악한 신이 주관하는 악한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의 세계와 악하고 더러운 이 세계는 절대로 만날 수 없다고 여겼으며, 이 악한 세계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그들이 만든 "종교철학적 지혜"를 지식으로 습득해야 점점 선하고 본질적인 세계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고 그것을 그들의 신앙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하늘 세계에서 물질 세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악한 세상 속에서 진리와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더욱 납득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 불의하고 고난 투성이인 현세에서 하늘의 행복과 진리를 누릴 수 있다는 진리는 그들로서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지금 고난 중에도, 불법이 가득하고 불행이 넘치는 현세에서도 능히 의와 진리와 소망이 넘치는 영생을 누릴 수 있다"라고 역설하신 것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세상은 악하다고 하는 세계관이나, 그리스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가 만들어 낸 이원론적인 세계관 즉 본질은 따로 있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이론과, 따라서 눈으로 보이는 육의 것은 악하고 보이지 않는 영의 것만 선하다고 하는 이 사상들은 오늘날 모든 불신앙인들의 보편적 인생관이 되었습니다. 허무와 비애, 모순투성이의 세계가 바로 이 세상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 복음은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말합니다. 죽음이 아니라 영생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 안에 참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2.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신앙의 필연성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예수님)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49,50절)고 말씀합니다. 조상, 광야, 만나, 죽음이라는 단어는 모두 인생의 내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다 죽었습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세상의 만나인 행복과 문화와 과학과 사랑을 먹었어도 죽었습니다. 그토록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소망과는 달리 왜 인간들은 죽음의 길로 가야만 했을까?

 

    궁극적으로 인생 자체의 불의함 때문입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떡이었지만 조상들이 그 거룩한 은총을 입고도 깨닫지 못하고 반역의 길인 불신앙의 길로 가다가 멸절되었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불신앙의 열매라는 것이 말씀의 진리입니다.

 

    율법과 철학과 도덕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들이지만 인생 자체가 불의하기 때문에 그 진리의 법에 실패하고 모두 사망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집약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알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신앙 필연성의 절대적 가치입니다. 예수가 아니고는 우리에게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3.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신앙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본문 5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먹는 것"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먹는 것으로 묘사된 신앙의 바른 의미는 1) 영접을 뜻합니다. 듣고, 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또 객관적으로 객관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2) 또한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순종을 말합니다. 배고픈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아니 불평할 여유가 없습니다. 먹을 뿐입니다. 신앙은 굴복이 아닙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지 아니하면, 즉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말씀이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3) 더 나아가서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충성을 뜻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니,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 속에 모시고 살게 되었으니, 말씀에 대한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뒤를 돌아봐서는 안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바르게 믿읍시다. 예수 신앙안에 거하며 사는 성도님들이 되십시다. 오직 예수 신앙은 필연이요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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