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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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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누가복음 10:25-37(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핵심적인 단어 몇 가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1) "율법사" 라는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2) "시험하여"  3) "영생"  4) "진정한 이웃"  5)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국적이나 신분고하 등이 전혀 명시 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한 점)  그리고 6)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이 주고자 하는 말씀의 의미는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선한 이웃이 되라 하시는 말씀인데, 그러나 실질적 핵심은 영생 문제에 있었습니다. 즉, 영생이라 함은 선한 이웃이 보여 주고 있는 것 처럼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열쇠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배재된 율법도, 믿음이 배재된 행위도 결코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율법을 완성케 하려고 오신, 그래서 강도만난 자 같은 나를 만나 주시고 살리신, 선한 사마리아 인, 예수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영접하고 믿는 믿음만이 우리앞에 놓여진 영생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쇄가 됩니다.

 

1. 어떤 길이 영생의 길인가요(25)?
    예수님을 찾아 온 율법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즉, 율법사는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 행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행하는 의로운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질문의 요점"입니다. 좀더 핵심적인 부분을 지적하자면 마치 율법을 폐하기 위해 온 듯한 인상을 남겨 주는 예수님께 대항하여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는 영생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미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율법사에게 되 질문 하실 때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 되 있느냐"하시는 물음으로 답변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율법사의 재미있는 표현인데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말씀입니다. 과연 영생을 얻고자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그런 물건과 같은 것일까 생각할 때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위선적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행을 하면 그것으로 영생을 얻는다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많은 구재를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선행이 나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어떤 행위의 댓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영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선한 행위로 자신의 악한 모습을 위장하려 합니다.

 

    영생은 율법적 행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말씀하고 있고, 3장 11절에서는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3장 12절은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사가 말하는 영생의 길에 대한 논리에 반하여 예수님이 증거하신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형식"이 아닌 "실재"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어떤 "형식"에 얽매이게 될 때 그 "형식"에 따라서 덤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위가 동반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답변 가운데 28절을 보면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아는 것"이 답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답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행위는 "믿음이 동반된 행위"를 의미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선언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구원의 길" 그 자체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행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3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7절에서,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대 선언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영생은 내가 의롭게 삶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 의를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2. 영생의 길을 묻는 율법사에게 제시하신 길이 있습니다(25-28절).
    예수께서 질문으로 답을 대신하신 내용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 있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율법사의 대답은 사랑에 대한 말씀인데, 첫째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답을 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그대로 인용한 말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사가 인용한 말씀의 "하나님 사랑"은 전인격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습니다.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습니다.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습니다.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답변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에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 역시 형식에 치우친 사랑이 되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에 치우친 이웃 사랑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인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함께 하지 않은 구제는 진정한 구제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동반되지 않은 도움의 손길은 동정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동정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말씀 그대로 사랑으로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이처럼 율법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핵심적인 말씀으로 종합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25절 "시험하여 가로되"라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을 자랑하며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이런 의도를 가진 율법사의 질물에 대해 예수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시고, 단순히 "그대로 행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렇게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알고 있는대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율법을 알고, 암송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서 분명하게 밝히기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했습니다. 또 10절에서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외성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부분적인 실천은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항상",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참 신앙은 이론만이 아니라 말씀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야고보 사도는 허탄한 자랑을 악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된다"(야고보서 4:16-17)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29-37)?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는 율법사에게 진정한 이웃의 의미를 예화를 통해 전해 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강도만난 자를 못 본척 피해 지나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치료해 주었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적절하고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27km 정도의 거리에 해발 915m에 위치한 예루살렘에서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 길에 홈이 패인 거친 길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지역적 상황을 현실성있게 예를 들어 말씀하고 계신 것인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왜 그냥 지나쳐 가는 것으로 말씀하셨을까 하는데 대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어쩌면 자신들도 강도를 만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심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굳이 예수께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고 꼬집으신 것을 보면 어쩌면 율법적인 문제를 지적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강도 만난자가 혹시라도 죽은 자라면, 율법에 죽은 자를 만지게 되면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행위가 아니었을까 하는겁니다. 만일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면 이는 맹목적인 율법주의와 이기심에서 기인한 행동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율법적 금기 사항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우선이었습니다. 본문에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자신의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들여 그를 돌보아 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율법사는 당연히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극과 극을 표현한 비유이기는 했지만, 유대인들 스스로가 죄인 취급했던 사람이 자비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그가 진정한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다고 하는 답변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큽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참된 이웃이란 외형적인 모습이나, 신분적 차이 등등을 뛰어넘어 보일 수 있는 실재적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와 답변을 통해서 율법사 스스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메시지는 "누가 나의 이웃이냐" 또는 "누가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이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에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누군가의 이웃이 되 줄 수 있는 사랑의 용기가 있느냐"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명령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였습니다. 거기에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재적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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