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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누가복음 15:25-32
본문의 비유 말씀은 15장 11절부터 시작됩니다.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리고 대부분의 설교가 이 두 아들 중 둘째 아들에게 촛점이 마추어져 있고, 제목은 "돌아온 탕자"로 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유 말씀 가운데 아주 유명한 말씀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들어 보지 못한 성도님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리고 결론은 대부분 "우리도 과거에는 탕자와 같은 삶을 살던 죄인들이었는데, 돌아온 둘째 아들과 같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탕자를 맞이하여 용서해 주시고, 그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축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속에 숨겨져 있는 비유속의 또 다른 비유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와 더불어서 늘 아버지 곁에 있었던 또 다른 탕자, 첫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여 주심으로 타성에 젖어 신앙생활하고 있는, 당시에는 바리새파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에는 성도들의 건강하지 못한 위선된 신앙에 대해 꼬집어 말씀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읽는 성도들 대부분의 눈이 오직 돌아온 둘째 아들과 그를 맞이해 주는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머물러 있을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 주시고자 하는 첫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칫 외면 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 짧은 이야기안에서 건강하지 못한 신앙인들의 한계성과 그 폐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진짜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아들은 건강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이기적인 관심사로 마음이 어그러져 있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전개가 됩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집에"(25절)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작은 아들과는 달리 근면한 생활을 하는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또 다르게 좀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나중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 볼 때, 맏아들의 관심사는 오직 밭과 그 소산물에만 있었다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집을 떠난 동생의 형편에 관한 염려도, 또 부친의 애닲은 슬픔과 걱정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듯 합니다. 동생이 집을 나간 후에도, 그래서 가정이 늘 우울했을 터인데, 2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해...어김이"없이 밭과 집 사이만을 오갔습니다.
그가 진정 29절에서 그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를 섬겨 명을" 받들고자 했다면 아버지의 가장 큰 고통이었던 동생을 찾는 일에도 어느정도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에는 17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풍족한 품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첫째 아들과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남들 보기에는 성실하고 열심히 생활하는 듯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이웃에 대한 긍휼과 자비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탕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크게 열심을 내지 못합니다.
2) 치우친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25절) 그의 발걸음이 멈춰서 버렸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웃음소리도 들었을 터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불쾌한 듯 종을 불러내 "이 무슨 일인가?"(26절) 라고 퉁명스럽게 물어봅니다. 맏아들은 "나는 하루 종일 땀 흘리며 밭에서 일하다가 오는 길인데, 이 무슨 가당치 않은 일들인가"라며 왜 잔치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기에 앞서 그 잔치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28절에서는 맏아들이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위가 어떻게 됐든 바쁜 농번기에 이런 잔치를 벌이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해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같이 치우친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이나 사상 이외의 것은 백안시 하거나 또 정죄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낙타 가죽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식물로 삼았던 세례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을 가리켜 "귀신이 들렸다"(눅 7:33)고 조롱했고, 주님의 대중적인 생활에는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세속주의자"라는 비난을 한거 아니겠습니까(눅7:34)? 이처럼 그들이 독선과 폐쇄된 마음을 가지고 배타주의로 흐르는 이유는 생명 없는 의식주의의 신앙적 가치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늘 인격적인 교제를 하면서 우리의 심령이 의식주의적인 위선에 빠지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맏 아들은 순수의 상실로 감정이 메말랐습니다.
1) 사랑의 상실로 인해 그 마음에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맏아들은 잔치의 내용을 묻되 "한 종을 불러"(26절) 물어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먼저 아버지를 찾아 잔치를 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질 않았습니다. 분명 이 맏아들도 어린 시절에는 매사에 아버지부터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의뢰하고 그 이름을 인정하며, 그 이름으로 교훈과 지도를 받는 것을 기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순수했던 사랑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맏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물질적 이해의 대상으로 무조건적인 관계가 아닌 조건적이며, 상대적인 재산 상속인의 관계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건강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순수한 사랑의 가치를 잃어버린 자들은 그 지독하고 교만한 분리주의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마저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물질의 공급자로 여기는 신앙관으로 본질적 사랑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대신에 로마서 10장 3절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하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맏아들은 진리의 상실로 주변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맏아들은 맏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얼마든지 당당하게 대문으로 걸어 들어가 부친과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깥에서 종과 은밀히 내사를 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불순한 자들은 진리보다는 사특함을, 빛보다는 어두움을 더 선호합니다. 하나님과의 순수한 관계를 상실해 버린 자들은 결국 인간적인 방법으로 삶의 방편을 삼을 수 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막7:7) 삼고 불신앙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3. 맏 아들에게는 참된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1) 수용력이 결여되어 있어서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했습니다.
동생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게 된 것과, 또 그로 인해 부친이 잔치를 벌이게 된 내용을 종으로부터 전해 들은 맏아들은 돌아온 동생과 함께 기뻐했던 것이 아니라 당장 노를 발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동생의 회심도, 아버지의 기쁨도 수용할만한 넓은 포용력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바른 복음안에 거하지 못해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삶의 가장 큰 조건인 이해력과 포용력, 그리고 사랑과 수용심이 결여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도 못하고, 이웃의 허물도, 자신의 모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운데 괴로워할 뿐입니다.
2) 자재력의 결여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게 됐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나와서 권"(28절)하는데도 이성을 찾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마땅히 맏아들로서 모처럼 되찾은 가정의 기쁨에 동참했어야 옳았지만 오히려 분위기에 찬물을 뿌리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맏아들의 반응으로 인해 성경에는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짐작컨데, 잔치자리의 분위기가 돌연 서먹서먹하고 편치 않은 자리로 바뀌었을 겁니다. 이는 그가 가정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모습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위선은 때가 되면 필연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3) 무엇보다도 맏아들은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지를 못했습니다.
화가 나 있는 맏아들에게 나온 아버지는 아마도 "그러지 말고 들어와 돌아온 동생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함께 축하해 주자"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권하는 말을 들은 큰 아들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고 답을 합니다. 아버지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공경의 대상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권면과 순종의 관계입니다. 맏아들은 신분은 맏아들이었지만, 맏아들로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종으로 여기며 살아왔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이야기 합니다. "애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가 아니라 "우리가"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둘째 아들은 눈에 보이는 행위적 탕자였는지 모르지만, 첫째 아들은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불신앙의 탕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물질을 탕진한 탕자였는지 모르지만,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린 탕자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혹여 이해 관계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 드리고 기도하지만, 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게 되면, 마치 요즘 가족들이 물질로 인해 가족을 버리듯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해관계로 얽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예수신앙에는 "무엇 때문에 믿는다"고 하는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과 사랑 그것이 하나님과 성도간에 필요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이웃을 보고, 믿지 않는 가족을 돌아 보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든 탕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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