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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7/7/30 열린 눈을 주옵소서

관리자 2017.07.29 14:10 조회 수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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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민수기 22:28-34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호기심 가는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이야기가 있고,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에 얽힌 이야기라든가 그 과정에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 출애굽 당시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 반석을 처서 물이 나오게 하고, 새벽마다 이슬같이 내리는 만나 이야기, 이스라엘 땅에 심한 가뭄이 들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자기와 아들에게 마지막 음식이 될 밀가루 한 웅큼과 약간의 기름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함으로 가뭄이 다 지나가기 까지 밀가루 항아리에 가루가 끊어지질 않았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게 된 사르밧 과부에게 일어났던 기적의 이야기(왕상 17:8-) 등등 참 많습니다.

 

    오늘 함께 봉독한 말씀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을 합니다. 당나귀에게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사막길을 걸어 드디어 요단동편 모압땅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모압왕이었던 십볼의 아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 해서 선지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초빙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 청탁을 합니다. 금은 보화와 높은 자리를 보장하며 발람을 청했는데, 하나님은 발람이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명령 하시기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이니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탐욕과 야망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리에 가기로 결정하고 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고 서서 발람의 가는 길을 막으셨고, 이를 본 당나귀는 앞으로 나가기를 거부합니다. 당나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발끈한 발람은 자기 발을 상하게 한 나귀를 때리게 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당나귀가 아에 발람 앞에 주저 앉아 입을 열어 말을 합니다. "내가 평생 주인을 모셔왔는데 한번이라도 이런 일이 있었느냐" 항변을 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미련한 선지자를 하나님은 당나귀의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하게 하심으로 그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짐승보다도 더 우매한 자가 됩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듯이 분명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세상 재물을 탐하게 되다보니, 눈이 어두워져서 미물인 당나귀는 보는데 정작 선지자라고 하는 발람은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뺀채로 길을 막아선 것을 보질 못했습니다. 나귀가 길을 벗어남으로 발람의 가는 길이 잘못된 길임을 알려 주었으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발람의 발을 돌담에 비비어 상하게 함이 더 큰 생명을 구하기 위함인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나귀가 발람앞에 꿇어 앉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함을 보여 주었으나 그래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지자 발람이었습니다. 더욱이 당나귀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하셨는데도 이미 탐욕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닫혀, 보고도 볼 수 없는 맹목적인 인간이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정욕이나 탐욕에 빠지면 이렇게 눈이 어두워집니다.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삼손도 이방여인 드릴라에게 눈이 멀었을 때 그의 인생이 참혹하게 되질 않았습니까?

 

    세상 물질과 세상 명예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지면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복된 길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판단에 좋게 보여도, 성공하는 길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그 길이 아니니 가지 말라" 하시면 멈춰 설 수 있는 신앙의 결단력이 있어야 성도인겁니다. 분명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시고 있는데, 세상 욕심따라 살다보니, 우리 심령 가운데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아니 듣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육신의 안목을 따라 눈에 보기 좋은 대로 길을 선택해 가고자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로마서 8장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은 하필이면 왜 우매함의 상징인 당나귀를 사용하셨을까요?
    성경 주석가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간사한 말로 속삭여 죄짓도록 유혹할 때는 교활한 뱀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을 깨우치실 때 속담에도 둔하고 바보스러운 짐승으로 등장하는 어리석은 나귀를 이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공교하게 속이는 말로 인간의 마음을 무너뜨리는데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병든자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 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있을 때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고하기를 눈먼자가 눈을 뜨며 병든 자들이 치료함을 받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하셨습니다. 그렇다 아니다 설명할 필요 없이 눈으로 본 그대로 전하라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과 가난한 자들과 병든자들의 친구가 되 주셨던 예수님을 육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바라보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단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놀림받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니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닌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보였고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못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해 주시고 말씀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커서 이제는 자기 안에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했고, 죽으나 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속죄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커서, 그 예수의 은혜를 위해 자신이 지금까지 움켜쥐고 자랑하며 살아왔던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린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당나귀를 등장시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지혜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시간 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의 눈이 밝아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발람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실 때까지는 신기한 사건들이 주위에서 일어나도 왜 그러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나귀가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아도 왜 그러는지를 몰랐습니다. 자기 앞에 꿇어 엎드려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 발람은 혈기만 부릴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나귀가 입을 열어 말을 해도, 이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발람이 보인 행동은 인간의 우매함을 그대로 보이는 어리석은 행동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의 눈을 열어 주시니 비로소 당나귀가 보았던 하나님의 사자를 볼수 있었고, 하나님이 이 어리석은 선지자의 귀를 열어 주시니 당나귀가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똑바로 볼 수 있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살아 온 것 같지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오늘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운이 좋아서, 내게 능력이 있어서, 내가 사람들로 부터 인기가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온 줄 아십니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보호해 주셨고, 내 가는 길을 인도 해 주셨고, 내 앞에 놓인 수 많은 위험과 사건과 사고속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건져 주시고 살려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을 사는 생활 속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찾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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