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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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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태복음 2:1-11

 

    오늘은 주님이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성도님들의 가정과 사업장위에 성탄의 은혜와 기쁨이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영적 암흑기에 있었던 당시 지도자들은 종교적 안일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외식함으로 그들의 탐욕만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천사들에 의해 유대인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방인인 메데사람 동방 박사들에게 별을 통하여 알려지게 됨으로 유대나라의 가장 낮은 자와 이방인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방박사들의모습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1.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드렸습니다.
    1) 장소를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이 박사들이 출발한 지점은 메소포타미아로 추정을 합니다. 그곳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1500km나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8시간씩 걷는다 해도 두어달 이상 족히 걸리는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사들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멀리 동방으로부터 올 때는 기대가 부풀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별을 따라 찾아간 곳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마굿간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동방박사들은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이 아기가 유대인의 왕이란 말인가? 이 아이가 정말로 왕 중의 왕이며 ,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란 말인가? 실망을 금치 못하며 의심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명했습니다. 구유에 뉘여있는 아기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형적인 장소를 의식하지 않고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성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무엇이 세상적인 관심사인지 분별할 줄 아는 성도가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자기의 주관을 버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처음에 세상을 구원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야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박사들이 제일먼저 찾아 간 곳은 왕궁이었고, 그곳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2절) 메시야의 탄생을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메시야의 탄생을 묻는 박사들의 질문으로 동요를 일으키는 왕궁 분위기를 본 박사들은 메시야가 왕궁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그들의 주관적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과 견해를 버리고 그들을 처음부터 인도했던 별빛을 따라 별빛이 인도하는대로 초라한 마굿간으로 갔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는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나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그들의 주관을 버리지 못했다면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자기들의 판단을 버리고 순순히 별빛의 인도를 따라 나선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땅 변두리 촌이었던 베들레헴 동네의 한 초라한 마굿간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관이 옳다고 무조건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시지 않았다 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주관을 버리지 못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를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습니다.

 

    3) 경배의 대상을 확실히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기께 경배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 하여 "성모"라고 부르며 동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존경의 대상은 될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배의 대상이 되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 외에도 신앙의 훌륭한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웨슬레, 칼빈 등의 인물들은 우리가 존경하며 본 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광적으로 추종한 나머지 복음보다는 그들의 신학만을 옳은 것으로 인정하거나 성경보다 그들의 신학을 우선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우리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를 두어야 하는 것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합니다.

 

2. 동방 박사들은 보배합을 열어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 예물들은 왕에게 드려지는 값비싸고 의미있는 예물들인데 동방박사 세 사람은 이같은 예물들을 준비하여 드림으로 자신들의 신앙의 정도를 표현했습니다.

 

    1) 황금을 드렸습니다. 이 황금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동방 박사들이 드린 황금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음을 정표로 드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님들이 황금 같은 믿음 드리는 것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변함없는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2) 유향을 드렸습니다. 유향은 향료입니다. 향기롭고 상쾌한 냄새가 납니다. 이 유향은 성도의 행실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자신의 행실을 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복음의 향기를 널리 퍼져나가게 할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자신의 아름다운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몰약을 드렸습니다. 몰약은 장사지낼 때 필요한 물질입니다. 향료로서 시신의 썩는 냄새를 방지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이 몰약은 나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때 시신을 이 몰약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장사지냈습니다. 이 몰약은 성도의 희생을 뜻합니다. 오늘날은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자기 희생을 통하여 헌신하며 나누는 삶을 살게 될 때 전도 결실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주님의 탄생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요?
    1)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하여 우리의 보배합을 열어야 합니다.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 동방 박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보배합을 열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께 경배하고 그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의 보배합을 열어야 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누추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께 박사들이 보배합을 열었던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우리의 귀한 보배합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보배합을 열어야 합니다. 눈물의 보배합을 열어야 합니다. 헌신의 보배합을 열어야 합니다. 나눔의 보배합을 열어야 합니다. 베푸는 삶의 보배합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희생의 보배합을 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2) 우리 성도들은 오늘 성탄을 맞이하여 자신을 버리는 심정으로 보배합을 엽시다.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기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산 자(마 13:44)와 같이 우리의 모든 가치를 예수님께 두어 우리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버리는 심정으로 보배합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히 마음의 보배합을 열지 않고는 우리 가운데 찾아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마음의 보배합을 열어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열매, 사랑의 열매, 용서의 열매, 감사와 기쁨의 열매를 드림으로 먼길을 찾아 온 동방의 세 박사들과 같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충만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로마의 황제 시이저는 왕이 되기 전 장군으로 있었는데, 그의 부하들과 함께 병졸처럼 참호 안에서 일을 하였다고 역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던 콘스탄틴 황제의 모친 헬렌도 병원에서 불구자들의 종기를 치료하며 보통 사람들도 더러워서 하기 힘든 일들을 손수하였다고 했습니다. 지체가 높은 그들이 그러한 일을 했다고 하여 그들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신 것처럼 우리도 겸손하여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궂은 일, 힘든 일, 더러운 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아하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낮고 천한 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가르쳐 주셨던 것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힘든 자리에서 우리보다 더 어렵고 힘들어 하고,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찾아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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