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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6/10/9 마음이 청결한 자

관리자 2016.10.08 12:08 조회 수 :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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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마태복음 5:8
  
    깨끗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오늘날처럼 주변 환경이 문화적으로 오염된 상태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말이나 행위, 그리고 환경이나 삶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는 의미로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곧 내적 심성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말이나 행위가 거룩해 보여도 마음과 동기가 불순하면 이미 그 거룩함은 위선이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현대의 율법주의 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위선자들이라 책망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때묻고 더러운 심령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종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고, 쾌락을 사랑하며 좇는 자는 향락의 종으로 타락함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때묻고 더러운 심령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데,
    
    1)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깨끗한 흰옷에 묻은 티는 눈에 잘 띄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검고 어두운 옷에 묻은 얼룩이나 티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더러움을 제대로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죄로 무디어졌고 그렇듯 무디어진 양심은 부도덕한 세속에 익숙하게 물들어 있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없게 합니다.

    2) 때묻고 더러운 심령은 거룩하고 의로운 것을 모릅니다.  간교하고 교활한 사람, 거짓으로 일관된 삶을 사는 사람이 정직한 것과 의로운 것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진리를 비난하고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도적이 법관을 피하고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 의심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의심 많은 인생이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없는 진실입니다. 이 점을 잘 아시는 주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거지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말씀이나 선지자를 믿지 못하는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심지어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증거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그의 대속 그리고 그의 모든 긍휼과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으로 믿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물며 부족한 육의 눈에 의심이란 색안경을 덧쓴다면 어찌 하나님의 약속이나 진리의 말씀이 믿어질 수 있겠습니까?

2. 정결한 심령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산 짐승을 찾지만, 까마귀는 썩고 부패한 고기를 찾습니다. 돼지는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그저 먹을 것만 찾아 다니지만, 양들은 깨끗한 풀을 찾아 다닙니다. 이처럼 마음이 청결한 자와 세속적인 사람의 찾는 것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고 괴로와 하며, 그 해결책을 찾으려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서 때로는 폭풍우 속에서, 때로는 산울림 속에서, 때로는 볼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본문의 말씀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청결하다는 말은 "katharos"인데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 신학자 바클레이는 (1) 더러운 옷을 세탁했을 때 사용되는 "깨끗한"의 뜻을 가진다 했고, (2) 추수하여 타작한 곡식을 키질하고 채로 쳐서 모든 겨를 포함한 이 물질을 제거한 곡식이나, 무능력한 군사들을 다 빼 버리고 남은 정예 부대에 사용되는 말의 의미로 해석을 했고, (3) 물을 타지 않은 순전한 우유나 포도주, 합금되지 않는 금속에 사용되는 말로 "비혼합", "비합금"의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는 "이 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을 의미하는 말로 신학자 헨드릭슨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일편 단심 하나님을 찾는 것, 즉 심정의 분열 없이 하나님께 성실한 것"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 분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썩은 고기를 찾아 헤메이는 까마귀처럼 세속적이고, 우리의 영혼은 병들게 하는 그러한 것들을 찾아 헤메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일편단심 하나님만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자 몸부림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마음의 청결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그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함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창6:5,8:21). 이렇게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삶을 누가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 13장 23절의 말씀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흑인의 피부를 하얗게 만들 수 없고, 표범의 얼룩무늬를 무늬없는 단색으로 만들 수 없듯이 악에 익숙한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조각한 상에 생명을 넣을 수 없듯이 악한 인간이 정결한 마음을 갖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만 변화와 중생이 가능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심령을 청결케 하는 일은 성령님의 은혜로우신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빛을 우리 심령에 비취시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정결하게 씻으십니다. 성령의 사역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악한 본성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중생케 하십니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정결하고 거룩한 것과 선한 것을 사랑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 하나님의 존 전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사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입니다. 때문에 모든 성도들은 그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죄와 모든 세속적 욕심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뵙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실락원의 저자 밀턴은 "지혜를 갖추지 못한 신체는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원색적이고, 폭력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건강한 육체가 지혜의 인도를 받게 될 때 높은 이상의 기초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안을 벗어나 길을 가노라면 마귀는 우리를 타락의 늪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건강한 육체에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의 일화입니다. 환상 중에 마귀가 그에게 나타나 루터의 죄가 낱낱이 기록된 종이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루터를 비웃으면서 "너같이 죄 많은 녀석이 어떻게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바로 살아라"라고 했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힘없이 앉아 있는데 뒤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는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 때서야 루터는 새 힘을 얻고 종교 개혁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고 말씀 하십니다. 악한 마귀는 세상 유혹으로 우리를 넘어 뜨리려 하나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십니다. 예수 공로 의지하여 마음이 청결한 성도님들이 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가운데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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