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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2017/10/29 교회성장과 가정축복

관리자 2017.10.28 17:57 조회 수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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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사도행전 2:38-42

 

    사도행전의 수많은 교회 중에 유대인을 중심한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을 중심한 수리아 안디옥 교회를 초대교회들 중 대표적인 교회라고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은 가히 경이적이었습니다. 120명이 3천명으로, 5천명으로 다시 수만명으로(행 21:20) 겨자씨 성장 법칙을 따랐습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관한 표현을 보면 "수다한 사람이 믿고"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 11:21, 24, 26) 말씀하는데 몇 명인가는 밝히지 않았으나 역시 큰 집회임을 볼 수 있습니다. 질적으로도 완벽한 것은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행 2:41)했습니다. 믿겠다고 손 든 정도의 신앙인이 아니요, "제자"란 단어를 사용한 것을 통해 구원받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숫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의 성장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장둔화는 오히려 구원받지 못한 숫자의 증가를 의미 합니다. 교회부흥의 후퇴를 통곡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1.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어떤 설교이든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는 구약의 예언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란 핵심을 반드시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알지 않겠노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은 지금보다 인권이 더 형편없었고, 빈부의 격차가 더 심했고, 사회 환경이 더 형편 없었습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구조악과 싸우는 것보다 먼저 구조악을 만든 마귀와 싸워 물리치고 인간의 타락한 품성을 치료하는데 근본처방을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권능을 끊임없이 선포했습니다.

 

    장로교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지나친 칼빈신학의 강조나, 진보교단이 신권회복은 도외시 한 채 인권회복에만 치중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의 변론은 신학자들에게 맡기고 인격체인 개인구원에 정열을 기울이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 개선의 사명을 뜨겁게 가져야될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들만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훌륭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구원의 감격이 없이는 설교나 전도나 사회 개혁은 사랑으로 하지 못하고 분노로 치우칠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할 위험이 있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행 4:12)는 성경의 근본 메시지를 힘써 외칠 때 교회는 건강해지고 부흥될 것입니다. 제대로 심겨진 나무가 잘 자라듯 예수 그리스도 신앙안에 올바르게 뿌리를 내린 교회와 성도의 신앙은 레바논 백향목처럼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중심, 말씀중심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들을 합니다. 말씀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고 구원의 감격을 가진 성령충만한 교회와 성도들이 될 때에 그 교회는 건강해집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2. 기도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의 말씀에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모든 성도들이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하는 유대인의 습관을 지키면서 초대교회는 기도의 열기가 하늘을 향해 불타 올랐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마틴루터에 근거를 둡니다. 영어로 개신교를 가리켜서 "protestant"라고 하는데, 이 말 자체가 개혁이고 저항입니다. 루터의 신앙 개혁 정신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을 배워야 합니다. 루터는 하루에 두시간씩 기도했습니다. 바쁜날은 세시간씩 기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몇시간 기도했다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기도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쁘다는 말은 일이 많다는 뜻이고 일이 많으니 기도도 더 해야 되는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루터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힘이 그로 위대한 개혁 교회를 탄생케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루터의 이론보다 훨씬 발전시킨 교회이론을 조직했는데도 참신한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은 바른 기도, 참된 기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죽은 교회는 성장 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죽은 가정은 문제 해결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죽은 사업은 뿌리뽑힌 나무와도 같은 것입니다.

 

    초등학교 출신의 스펄젼 목사님은 목회자들이 그렇게도 부러워하는 설교의 황제란 명예를 얻게 된 것도 기도의 힘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말하기를 하나님앞에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자기 교회에서 제일 기도 많이 하는 성도보다 4배를 더하시오"라고 했다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그렇게까지 기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몇시간 기도했네 하는 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몇시간을 기도했느냐 보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기도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통곡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40일간 금식하시면서 기도 하셨습니다. 가정이 축복받지 못했다 말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전도 어렵습니다" 말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가정이 복을 받고, 기도하는 사업이 번창하며, 기도하는 교회만이 부흥된다고 이야기해도 절대로 틀린 말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올바른 기도가 메말라서 모든 것이 메마른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핑계는 바빠서 신앙생활 하기 어렵다 말합니다. 눈코뜰새 없이 처리할 일들이 많아서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고들 말합니다. 우리는 생활속에서 먼저해야 할 일과 나중해도 될 일을 구분할 줄 모릅니다. 바쁜 일과 중요한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살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먼저 할 일을 먼저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없어도 신앙이 먼접니다. 기도가 먼접니다. 바로된 믿음과 기도가 없이는 영원한 삶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무리 바빠도 중요한 일인 기도부터 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살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고, 성령님의 지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문제 해결 받기를 원한다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결함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가정 축복과 사업 번창을 원한다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축복과 번창을 보장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매사에 기도가 선행 되야 합니다. 매사에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3. 교회 본질의 사명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안타까운 것이 외형적인 건물에 지나칠 정도로 모든 정열을 쏟고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일해야 하는데, 성전 건축하느라 지처서 일하지 못하고 주저 않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음을 보게 됩니다. 부활 이후의 예수님의 명령은 한결같이 복음 전파였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지구 인구의 10% 만이 구원받은 백성이라면(통계적으로는 33%) 예수님의 명령은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의 전도 명령을 나라 개념이 아니고 민족 개념으로 생각할 때 통계를 낸 어느 자료에 의할 것 같으면 세계 24,000종족중, 아직도 11,000종족은 미전도 종족으로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할 때 복음의 큰 빚을 진 민족으써 복음의 부채를 갚는 심정으로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전도, 즉 복음전파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일년에 두 차례 전도주일을 정해 놓고 "전도하자" 합니다. 후반기 전도 주일은 11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전도하고 있습니까? 아니 전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 통계 자료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 대형교회 성도든 작은 교회 성도든 한국 교회 성도중 98퍼센트가 전도에 관심도 없고,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전도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나라 경제가 어려워져서 위기가 아닙니다. 북한이 미사일을 자꾸 날려서 나라 위기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위기입니다. 복음을 저버린 유럽 국가들의 오늘날 모습들이 어떻게 변하고 있습니까? 몇일 전 뉴스를 통해 들은 것은 이제 프랑스에서는 공문서에 어머니 아버지라는 글을 공식적으로 쓰지 못하게 했답니다. 동성부부들의 인권을 생각해서, 앞으로는 부모라는 말만 쓰라고 정했답니다. 세상 망해가고 있는 징조입니다. 복음을 버리고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복음을 대신해 받아 들인 결과입니다. 우리 나라도 멀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교회의 부흥만을 위해 전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해야 만이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사회가 살고, 나라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연보라고 했습니다. 이 연보라는 말은 남을 도와준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던 것처럼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를 구제하는데 많이 사용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에 보면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말씀해 주는데, 첫째 기준은 믿음에 있고, 둘째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 하신 것처럼 즉 믿음을 통한 사랑의 행위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믿음은 강조하는데 구제하는 일은 등한시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가르치는데, 사랑 실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는 구제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명령을 생각해 볼때도 구제에 전력을 다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 전파와 구제, 여기에 최선을 다 하게 될 때에 주님의 교회를 주인되신 우리 주님께서 창대케 하시고 부흥 성장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이와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성도님들 가정과 사업의 번창과 축복 또한 현실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될 것입니다. 신앙과 축복은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실천은 하나로 나타나야 합니다. 전도와 가정 축복은 절대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외형적인 것에 신경쓰다가 자칫 본질적인 문제를 소홀이 할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교회 성장과 가정축복 이루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의 본질인 예수 복음을 부지런히 전하십시다. 하루 일과를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무리 하는 기도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열심히 베풀며 사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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