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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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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0:23-24

    본문이 포함 되 있는 고린도전서 10장 14-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를 마친 다음 이제 본문 이하에서는 성도가 사용할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시장에서 판매되는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 아닌가 해서 사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교인들이 물건을 사는데 까지 일일이 양심 문제를 따질 필요없이 자유로이 물건을 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의 자유가 덕을 세우는 일에 장애가 되서는 안된다고 본문에서 권면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자유는 오직 덕을 세우도록 사용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함께 은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합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성도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그의 은혜 안에서 죄악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에든지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선언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습니다(롬8:2).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하지 못할 이유는 분명 없습니다. 본문에서처럼 음식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하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성도에게 모든 것이 가하다고 해서 모두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서신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적으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립적인 문제에 대해서 완전한 자유라는 원칙을 세워 놓았습니다. 바울도 이 원칙에는 동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같은 원칙을 생활에 적용할 때 한계가 있다고 밝힙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23절)고 말합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이므로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상들에게 드려진 희생 제물들을 먹는 것도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내게 가능한 하찮은 것이라도 나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식물들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지만 누군가에게 걸림이 되어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게 된다면 그 누군가를 위해 금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 자기가 먹는 고기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실족케 된다면 자기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고전8:13).

    성도 중에 믿음이 강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가한 줄로 알고 담대하게 행합니다. 그것은 음식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는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이 약한 성도인데 그것을 보고 "어떻게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성도가 먹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올무가 되어 실족할 수도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가한 것이라 할지라도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도는 비록 자신에게는 가한 것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유익이 없다면 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거나 형제를 실족케 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3.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가하나 행위 속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4절)고 했는데, 이와 같은 말씀에 따른 행위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 행동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성도들은 단지 자신들의 유익만을 구하지 말고 타인의 유익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행위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지만 주님이 세상에 사시는 날 동안 자기의 뜻대로 구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는 죄인을 위한 그의 사랑이 내면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형제의 유익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12:13)고 명령합니다.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롬15:1) 말라고 명령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실족케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진실한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라는 이름만을 가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의 유익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바라 카이저 부인은 이라크 조종사가 실수로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죽은 남편의 시체가 수송기에 오르는 모습을 다섯 살 난 아들 죤과 함께 지켜보면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제 남편은 천국에 갔습니다. 이제 제 남편은 지금 훨씬 더 편한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리고는 남편이 탄 함정을 공격한 조종사에세 전해 달라고 신약성경 한 권과 친필로 쓴 "영원한 평화의 서신"을 바레인 주재 미국 대사에게 건네 주었다고 합니다.

    바레인에 있는 남편과 휴가를 즐기러 왔던 바바라 카이저는 졸지에 남편을 잃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천국을 생각하며 남편을 죽인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사람인지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겨 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주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생활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릴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유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을 절제할 수 있다면 이에서 더 위대한 신앙의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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