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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생활

히브리서 강해 9

관리자 2017.02.15 17:27 조회 수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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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 걸음씩 전진할 것 6:9-12
9절:
    배교자들을 엄히 책망한 후에 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말로 [사랑하는 자들아]하고 불렀다. 히브리인들이 저주와 멸망에까지 떨어지지 않고 구원에 이르기를 위하여 친절히 권면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확신하노라]에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은 목회자가 자기에게 맡겨진 성도들을 향하여 부를 수 있는 최대의 칭호인데, 바울 서신에서는 자주 쓰였으나, 히브리서에서는 이 곳에 한 번만 사용됐을 뿐이다. 그런데 주로 중대한 권면이나 책망을 줄 때 또는 내용의 전환기에서 주로 사용되는 이 호칭이 여기에 사용됐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까지는 책망과 경고로서 수신자들을 염려하게 했던 경직된 분위기를 바꾸어 위로하며 새로운 내용을 선포하려 함을 암시한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확신하노라]라는 구절에서 더욱 명백해 진다.

 

    다시 말해서 신앙을 저버린 자들에 대한 심판의 선고가 성도들을 낙심시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경고의 말들은 경계를 주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유대인 크리스챤들이 구원에서 이탈되었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들에게는 보다 나은 것이 있음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 확신의 내용은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이다. 이 두 표현은 모두 문맥을 살펴볼 때 동격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옳은데, 이는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멸망에 처하게 될 자들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앞에서는 믿음을 저버린 자가 당할 처참한 멸망을 설명하고 여기에서는 다시 위로의 말을 던지는데 이는 양자, 곧 신앙을 저버린 자와 신앙인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이며 또한 올바르게 주를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10절:
    히브리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괴로움을 무릅쓰고 핍박받음을 참았다. 과거에도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고 있으며 장래에도 계속하여 봉사할 것이다.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은 공의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수고한 것을 결코 잊어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이다.

 

11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마음속에 깊게 품은 열망을 가리키는데, 그 소원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란 말은 이 편지를 받을 성도들 중에는 윗 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형제 봉사하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지마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라는 당부인데, [동일한]을 성도에 대한 사랑에 힘쓰는 것과 같이 소망의 달성에도 힘쓰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도들은 이처럼 횡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실천에 힘쓰는 동시에 또 종적으로 끝까지 하나님께 둔 소망의 풍성함을 지속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횡적 연락과 종적 계속이 통합하는 곳에 아름다운 역사가 흘러나오게 된다.

 

12절:
    [게으르지 않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란 말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과 그 신앙을 끝까지 지키기 위한 인내력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합치하지 않고는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세상 일이나 신령한 일이나 완전한 성공을 거둘 수 없다. 또한 [게으르지 않고]는 앞 절의 [부지런을 나타내어]를 반복 강조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믿음과 오래 참음]에서 [오래 참음]은 믿음을 위해 온갖 박해를 오랫동안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하는데, 이상근 박사는 [믿음]과 [오래 참음]의 관계에 대해서 "믿음은 오래 참음에서 나타나고, 오래 참음은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이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3) 약속과 맹세 6:13-18
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히브리서 기자는 앞 절에서 소망 중에 인내하여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 받을 것은 권면한바 있는데, 본 절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믿고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모델로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육신적 조상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들어 증명하려 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가지 약속을 하셨는데, 그중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약속은 [맹세]로 확증된 약속이다. 사람은 맹세할 때에 자기보다 크고 높은 사람이든지 귀하고 요긴한 존재든지 자기 힘으로써는 어떻게 하지 못할 대상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 보통이다(히 6:16).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존재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

 

14절:
    본 절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6-18절의 뜻을 취하여 간단히 운을 단 시구처럼 읽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 기억하기도 쉽게 인용하였는데,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진 이와 같은 맹세를 통해 주시겠다 하신 약속은 후사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그 이후 주어질 후손들의 번성과 범사에 창대하게 되는 축복에 관한 약속이다. 즉 본 절에서 주어지고 있는 약속들은 아브라함 자신의 신앙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제단에서 인정받은 후에 내려진 약속들인데 다른 약속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시면서 주신 약속이다.

 

15절: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한 것은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를 의미하는 표현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날 때로부터(창12:4) 아들을 기다렸으나 얻지 못하게 됐을 때에 집에서 오래 동안 함께 해 온 엘리에셀로 후사를 삼겠다 한 바도 있었고(창 15:2), 후일 86세 때에 아내 사라의 권고를 받아 들여 하갈을 통하여 인위적인 방법으로 서자 이스마엘을 얻어 후사로 삼고자 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브라함을 책망하시지 않은 하나님께서는 적자를 주시겠다고 재차 약속을 하시게 됐고,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린 아브라함은 적자 이삭을 얻게 됐다(창21:1-7). 이처럼 자녀에 대한 축복도, 복 주심의 축복도 모두가 다 오래 참은 신앙의 승리였다.

 

    우리는 여기서 철저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잃지 않은 것을 이유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분명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기다린 것은 사실이다. 허나 과정을 볼 때 아브라함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어 스스로 연약한 자가 되기도 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실수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시지 않고, 그 마음에 잃지 않은 믿음을 보시고 허물을 가리워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의의 조건으로 삼으시고 약속 성취의 축복을 주셨다.

 

16절:
    본 절을 통해 맹세에 대해 정의하기를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라고 하였다. 맹세를 통해 의심스러운 일이 확실해지고 믿게 되는데,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약속에는 비록 다투는 일은 없었으나 너무 오래 지체하셨으므로 아브라함의 의심이 풀리지 아니할까 해서 맹세로서 보증하셨던 것이다.    

 

17절: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란 것은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와 그 아들 이삭까지 그 속에 포함되고 그 다음 족장들에게도 약속하셨고, 그리스도를 신령한 대제사장으로 세우실 때에도 맹세로 약속을 보증하셨다(시110:4).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하게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한 것은 약속은 계약서를 쓰는 것과 같은 것이요, 맹세는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것으로 확실성을 나타내 주는 말씀이 된다.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는 것은 그 약속을 꼭 이행하고 변치 아니하겠다고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본 절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신실성을 나타내 주는 말씀이다.

 

18절: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약속과 맹세의 두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변해도 이 두 가지가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하나님 안에는 불가능이 없으시지만 거짓말 만은 못하신다(민23:19, 삼상15:29). 이런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약속하나면 충분한데 맹세까지 하심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성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이처럼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로 인해 반드시 응답하시고 이루실 것이다. 또한 이처럼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와 수신자들 나아가서는 소망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성도를 의미한다. [앞에 있는 소망]에서 소망은 19절과 20절에서 [소망]과 [그리스도]를 구별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된 구원의 축복]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른 이해다.
 
    (4) 소망의 목표 6:19-20
19절:
    [영혼의 닻]은 그리스도를 비유하고 있는 말씀으로 해석 이해할 수 있다. [닻]이란 것은 배를 떠 내려가지 못하게 고정시키거나, 또는 풍랑을 만난 배를 평온하게 정착시키기 위한 배에 부속해 있는 기구의 이름이다. 닻은 배 위에서부터 물 속에 있는 땅에 깊이 박혀서 수면에 떠 있는 배를 멀리 밀려 나가지 않게하고 한 곳에 안정시키는 중보 노릇을 한다. 우리 성도들이 탄 배는 교회인데,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의지할 닻과 같은 분이시다.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우리 영혼의 닻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우리 또한 그 영혼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견고한 은혜의 소망으로 [휘장 안에 들어]가게 됨을 얻게 될 것이다. 즉 견고한 영혼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변치못할 소망이 되신다. [휘장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성소의 휘장 안은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로 올라가려는 소망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지성소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20절:
    [그리로 앞서 가신] 지성소안으로 앞서 가신 그리스도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다. 세상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둘째 휘장을 열고 속죄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히9:7). 대제사장이 반드시 속죄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던 것은 속죄의 피가 없이는 죄를 없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히9:22).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장막 지성소안에 들어가심으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 주셨다. 이처럼 우리보다 앞서 올라가셔서 속죄의 사업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을 그리로 영접하신다.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는다고 한 것은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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