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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생활

갈라디아서 강해4

관리자 2017.08.19 09:46 조회 수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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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갈라디아서 2:11-16      "믿음으로 살리라"

 

2:11-16  누구든지 믿음으로 살리라
    2장 11절부터는 지금까지 논쟁해 왔던 할례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고 11절부터 14절까지 음식에 관한 문제를 이슈(issue)화 한다. 즉 이방인들의 음식을 유대인들은 부정한 음식으로 보았고, 심지어는 이방인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 조차 부정하게 생각했다.

 

    그 때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안디옥에 이르게 되었는데 바울은 베드로가 이 음식문제에 대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했던 그의 행위를 책망하게 된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할 때 베드로 한 사람만을 조용히 불러서 한 것이 아니라 14절 말씀에 보면 "모든 자 앞"이라고 언급을 하고 있듯이 공개적으로 했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영향력이 큰 위치에 있던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그의 비 복음적 행위를 책망함으로써 다른 이들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그리고는 2장 15절과 16절에서 다시 원점인 믿음과 율법관계를 설명하면서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유대 크리스챤들에게 복음의 절대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2:11  사도행전 15장 35절을 근거로 해서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거하며 복음 전하는 사역에 전념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안디옥에 도착했다. 불분명한 것은 정확한 시기와 무엇 때문에 안디옥에 내려왔는지에 대해서인데, 갈라디아서 어디에도 언급해 놓고 있질 않다.

 

    "책망할 일"(he was clearly in the wrong-NIV)에서 "the wrong" 이라는 단어, 즉 "그 잘못"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음식으로 인하여 어떻게 행한 것을 의미한다. "잘못"이라는 단어 앞에 "the" 관사를 사용한 것은 베드로의 잘못이 그저 막연한 그의 어떤 실수를 의미하지 않고 명명백백한 분명한 책망거리였음을 의미한다.

 

    2:12  사도행전 15장을(갈라디아서 2:1-10절까지를 대조해서) 살펴보면 모세의 율법과 할례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에 적지않은 소동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예루살렘에서는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이 문제 수습위원으로 이방교회에 파송하게 된다(행15:22). 이들을 파송한 목적은 할례나 율법준수 문제 해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음식문제에 있었는데, 음식문제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가결된 것은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것과 피를 멀리하라"(행15:20,29)는 것이었다.

 

    그런데 본절에서 베드로는 야고보가 보낸 즉,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는 이방인들과 음식을 나눔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부터 온 뒤에 발생했다. 전만 하더라도 12절이 언급하고 있듯이 이방인들과 평상시에 마주앉아 음식을 아무거리낌 없이 먹었었다(he used to eat with Gentiles). 그런데 본문은 저들이 오매 베드로가 이 할례자들을 두려워해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자리를 피해 떠났다(he began to draw back-물러서다-and separate-나뉘다-himself from the Gentiles)고 지적하고 있다.

 

    "어떤 이들"(certain men)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 만일 이 말씀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계속 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도행전 15장에서 지적해 놓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는 아닌듯 하다. 왜냐하면 이 회의가 끝난 후에서야 유다와 실라가 보내지기로 결정되었고, 사도행전 15장 22절을 보면 바울과 함께 파송됐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틀림없이 예루살렘 회의전에 발생되었던 문제를 보고삼아 예루살렘 회의에서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만일 이것이 맞는다면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부터 온 유대인들이 확실하다(행15:1).

 

    둘째는 유다와 실라로 보는 견해다. 예루살렘 회의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베드로가 안디옥을 들른적이 있는데, 이 때 유다와 실라가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오지 않고 나중에 안디옥에 온것 같다. 그러나 이 견해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에서 논의된바 있고, 유다와 실라가 실행위원으로 파견되 사도행전 15장 후반에 기록하고 있듯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다시 거론 될리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여기서의 "어떤이들"은 예루살렘 회의 이전에 안디옥을 방문한 소위 할례자 그룹에 속한 율법주의자들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할례자들을 두려워 하여" 베드로가 이들을 두려워 한 이유가 무엇인가? 장로의 유전과 구약에서는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고 심지어는 만지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을 먹거나 만지는 자들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까닭에 만일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와 같은 일을 행한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논쟁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할례당에 속한 자들의 질책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베드로는 비록 전에는 이방인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었었다 할지라도 이 싯점에서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13  이같은 베드로의 행동은 자신만을 이방인들로 부터 구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 절이 지적하고 있듯이 "남은 유대인"들도 외식하는 자와 같이 행동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바울과 함께 있던 바나바에게 까지 영향을 미쳐 그도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행동하게 됐다. 이러한 이유들로 바울은 베드로를 질책하기에 이르렀다.

 

    "남은 유대인들" 베드로와 같이 온 믿음의 형제들이거나 흩어져 사는 유대 크리스챤 그룹을 이르는 말인데, 유대로 부터 저 할례당들이 오기전만 하더라도 안디옥에 있던 크리스챤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한가지로 믿음의 형제의 의를 나눈것으로 안다.

 

    "외식하므로"(hypocrisy) 가식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복음서에서도 예수께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유대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하셨다. 즉 내면은 썩어서 냄새나는 자들인데 겉으로만 거룩한 척하는 위선자들이다.

 

    2:14  바울이 구태여 베드로를 책망하게 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베드로가 유대계 크리스챤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즉 복음의 참 진리는 복음을 받아 들이므로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같이 되야만 한다는 논리가 틀리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고, 둘째, 만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앞세워 이방인들 앞에 이러한 올무를 놓게 된다면 근본적으로 예수 복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본질적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이 염려하는 바가 무엇일까? 바울에게 있어서의 염려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의 음식이 그들 자신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이라는데 있다. 이방인들은 이제까지 그들이 행해 온대로 자신들의 음식을 먹어왔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서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 불신이 싹틀 우려가 발생되었고,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사조가 생겨나게 됐다는 점이다. 두번째 염려는, 소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어긋나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왜 바울이 다른 사람이 아닌 베드로를 질책의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바울의 책망 내용을 살펴보자. 바울은 베드로에게 "너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 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떻게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했다. 한 마디로 위선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를 항상 살펴보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형제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바울의 책망 포인트가 된다.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에서 "억지로"로 해석된 단어 αναγκαζειs는 (2인,단수,현재,직설 αναγκαζω) "강요하다, 억누루다"는 뜻의 강제성을 띤 의미를 담고 있다(compel-NASB, force-NIV).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어떠한 강압적인 힘이나 강요 또는 노력에 의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결과다.

 

    "보고"(when I saw) 무엇을 바울이 보았는가? 그들이 즉 베드로를 포함한 유대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아니함을(they were not acting in line with the truth of the gospel) 보고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했다.

 

    "모든 자" 이 말은 베드로의 행위를 모든 이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또한 그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서 어긋남을 모든 이들로 알게 하기 위하여 은밀히 베드로만 부르지 아니하고 대중앞에 드러나게 한 것이다. 여기서의 "모든 자"라 함은 베드로를 포함한 유대인들과 야고보로부터 온 "그 어떤 사람들"과 이방인중 믿음의 형제들 모두를 포함한다.

 

    "유대인답게" 어떻게 사는 것이 유대인답게 사는 것일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율법이나 그 밖의 장로의 유전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에 있지 않다. 소위 유대인이라 하면서 성경 말씀을 잘못 이해 또는 해석해서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으시게 했고, 위선으로 가득차 정작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자신들만을 위한 율법해석적 삶을 살아왔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율법을 준수하며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그들 앞에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는 올무(행15:10)를 놓을 수 있겠느냐는 지적에 있다. 이는 불가능한 일일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행위다.

 

    2:15  바울은 다시 역설적으로 그의 변론을 시작한다. 즉, "너희들이 주장하듯이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었지 이방 죄인들이 아니었다고 인정하자. 그런데 설사 우리는 우리가 자처하는 의인인 유대인으로 태어낳고 저들은 이방인으로 태어나 원하던 원치않던 자동 죄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예수 복음안에서는 무엇이 다르냐?" 자칭 의인이라는 유대인이나 죄인이라고 지적하는 이방인이나 하나님편에서는 다 똑같이 죄인이라는데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데,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믿음을 통해서 믿음에 의한 의인이 될 때 자칭 의인이나 이방인들로 부터 구별되게 된다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래 유대인" 영어성경에서는 나면서 부터 유대인(by birth-NIV, by nature-NASB)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속에는 선민 사상이 다분히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방 죄인" 유대인들을 제외한 모든 이방 민족을 이들은 무조건 다 죄인으로 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진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모든 이방민족은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논리다.

 

    2:16  여기서 바울은 다시한번 그의 논쟁의 핵심으로 돌아온다. 바울의 주장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결단코 율법의 행위에서는 올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방인이든 아니면 유대인이든 의로와 질 수 있는 것은 율법을 지키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바울의 기가막힌 표현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바가 아니냐"고 반문적 의미가 포함된 말을 던지며, 모든 이들을 자신의 역설속에 동의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의로워지는데, 이것을 믿음의 형제들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제와서 율법에 대해 운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이냐"는 항변이다. 이어지는 그 다음 말이 회심의 일격이 되는데,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우리"란 유대인 크리스챤들을 말한다. 바울의 역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설사 우리가 유대인이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터라 또는 그러한 이유로 우리도 의로워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율법으로 유대인이다 이방인이다 구별 짓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면 결단코 구원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는 말로 이 논쟁을 종결로 이끌어간다.
    1) 음식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다 죄인이다 구별짓지 말라.
    2) 이로 인해서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
    3) 나만 올무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나의 행위로 인해 같은 올무에 걸리게 된다.
    4)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의로워질 수 없다.
    5) 복음을 증거할 때 올바르게 증거하자.
    6) 만일 믿음의 형제중에서 이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면 책망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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