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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생활

히브리서 강해 6

관리자 2017.02.15 17:33 조회 수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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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호수아보다 더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4:1-16
    (1) 미치지 못할 자들이 있을까 두려워하라 4:1-2
1절: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셨던 안식 세계를 이스라엘인이 다 들어가지 못하고 60여만 장정들이 광야에서 엎드러지고 만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직까지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었으니 불행중의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해서 두려워 하라고 했다.

 

2절:
    주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인데 그 들은 바 복음의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않]음이라고 하였다. 누구든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도들은 말씀에 믿음을 화합해야 신령한 양식이 된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화합]이라는 말이 NIV 성경에서는 [combine]으로 번역해 놨는데 이 말씀의 번역은 들은 바 말씀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으면 또는 믿음과 하나되게 하지 않으면]이란 의미로 받아 들이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다.

 

    (2)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4:3-11
3절:
    본 절의 말씀을 통해 예정되어진 구원론에 대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우리는 전도를 받아 안식세계에 들어가지마는 또 하나님의 안식 세계에 들어가지 못할 자도 있을 것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고 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 과연 이 말씀을 안식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 즉 구원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가 이미 창조 때부터 계획되어진 일이라는 의미로 받아 들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일까 하는데 많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 말씀의 답을 본 절 앞부분의 언급인 [이미 믿는 우리들은]이라는 말씀에서 찾아 보자. 즉 구원의 선제 조건을 [믿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를 생각해 볼 때 이미 창조할 때부터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4-5절:
    안식에 대하여 창세기 2장 2절에 [하나님께서 엿세 동안에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하였는데, 또 다시 시편 95편 11절에서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하셨으니 필경 들어갈 자도 있고, 못 들어갈 자도 있으리라는 말씀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안식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지마는 또한 끝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6절:
    모세시대에도 광야에서 죽고 마는 자가 많았지만 그런 중에도 안식에 들어갈 자가 남아 있었던 것과 같이 예수의 복음이 선포될 때에도 그 복음을 받고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갈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할 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이처럼 어느 시대나 복음을 듣고 믿고 순종함으로 구원받는 안식에 들어갈 성도들이 있는 반면에 같은 복음을 들어도 그 복음의 말씀을 믿지 않음으로 즉 순종하지 않음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다시 말해서 과거 요단강 건너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불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광야 길을 건너 멸망자들과는 달리 가나안에 들어가 안식한 자들도 있다.

 

7절:
    모세 때보다 4백여 년을 지나 다윗 왕 때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어느 시대를 보든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듣는 자가 있는 반면 듣지 않는 자가 있고, 순종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자들이 있다. 본절 말씀의 의미는 그러므로 그 시대 사람들처럼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순종하여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안식처에 들어가자는 말씀인데, 그 말씀이 모세나 여호수아에 의해 전달되어진 말씀으로, 그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싶었다.

 

8-9절:
    여호수아가 만일 참 안식을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었더면 다윗 왕 때에 또 이런 경고를 하였을 까닭이 없다. 여호수아가 점령한 땅을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잘 나누어 주어서 그 이후로 전쟁과 고난이 근절 되었더라면 다시 안식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다시 안식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참 안식이 없었기 때문에 안식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그 분만이 모든 약속의 실체요, 영원한 안식을 주실 수 있는 주권자가 되신다.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가 주지 못한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을 주실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고 했는데, 그 때를 주시는 분이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10절: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후에는 복음을 받고 믿음으로 이미 안식세계에 들어간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쉰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이치로 생각해 볼 때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아 안식을 누리는 반면, 과거 거역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아직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주저하여 방황하는 자들 또한 많다.

 

11절:
    본절의 말씀은 3장에서부터 격려도 하고 경고도 해 오던 것을 다시 권면하여 이스라엘인들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말라고 거듭 거듭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노라고 하면서 언제까지나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계속하여 자기 노력과 자기 의로 하늘 위에까지 올라가려 하면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태도는 아니다. 또 환난과 핍박이 닥쳐오거나 시험과 유혹이 몰려오면 그럴 때마다 마음이 요동치고 변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소망이 없다. 그런 외부로서의 방해나 내부로서의 의혹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싸워 이기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담대히 나아가는(히4:16)것이 참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일이다.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것이란 말은 여러 번 주어진 기회를 놓쳐서 들어갈 사람들이 못 들어가서 아직 공중에 떠있다고 하여도 좋을 [저 안식]이다. [힘쓰라]고 하는 목적은 만일 힘쓰지 아니하면 즉 순종치 아니하면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 온 불순종의 [본]에 빠져 저들과 같이 멸망하는 자들이 될까 염려된다는 말씀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4:12-13
12-13절:
    하나님의 말씀이 만일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지 못하다면 니체의 말처럼 하나님이 죽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사람들이 엑스레이선 앞에서는 살이나 뼈 속에 감추어 있는 것들이 들어나지 않을 것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 보다 더 예리하고 운동력이 있어서 말씀 앞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한 보이지 아니하는 [혼과 영]속에 숨어 있는 어떤 비밀한 계교나 음모까지 다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들어날 수 밖에 없다. 사람의 눈앞에 숨어 있고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이 [만물]가운데 아직 많이 있지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숨겨질 것이 없다. 

 

    (4)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라 4:14-16
14절:
    [큰 대제사장-원문대로는 "위대하고 높은 대제사장"]이란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제사장들이 많이 있어 다윗 왕 시절에는 24반열에 나누어(대상 25:7-19) 하나님께 봉사할 사무와 반차를 나누어 담당케 하였었는데, 그중 대표, 즉 머리가 되는 대 제사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침례 요한 당시에 그 아버지 사가랴는 다윗 왕 시절에 나뉘었던 24반열중 제 8의 아비야 반열이었고, 대 제사장은 장자파에서 한 사람이 담당하였는데,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머리가 되는 제사장을 가리켜 대제사장이라 하였다. 대제사장은 자손이 계승하는 세습제도이었으나, 만일 대제사장이 무자하게 되면 족보를 조사하여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는 제사장들 중에서 계승자를 택하였다. 그러나 본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큰 대제사장]은 이와 같은 혈통을 따라 된 레위지파 가문의 어느 대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시는 [큰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했다.     

 

15절: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즉 체휼하시는 자신데, 우리의 연약한 것과 같은 연약한 것에 대한 체험이 있으시고, 또 긍휼히 여기는 긍휼하심이 있어 우리에게는 극히 가까우신 대제사장이시다. 여기서 말씀하는 [체휼한다]는 말씀의 본래의 뜻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지어본 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이로서(히7:26, 9:28, 벧전2:22, 요일3:5) 인간의 죄를 속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알지 못하신다는 것은 능력이나 지혜가 없으셔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 인간을 아시고, 인간에게 긍휼을 주시기 위해 인간을 체험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므로 인간처럼 인간을 위해 친히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   

 

16절:
    [그러므로]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나아가자고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 크리스챤들을 믿음의 길로 초청하고 있다. 사실 우리 인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형편에 적당한 은혜를 얻기 위하여 엄위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 인간을 체휼하시며(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완전한 중보자 노릇을 하실 수 있다는 데서 임마누엘이란 특별하신 이름을 주신 것이다(마1:22).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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