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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생활

갈라디아서 강해3

관리자 2017.08.12 10:31 조회 수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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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갈라디아서 2:1-10      "자유인"

 

2:1-5  복음 안에서의 참자유(종이냐? 자유자냐?) 
    2:1  "14년 후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고 돌아 온후 14년 뒤에 예루살렘을 다시금 방문하게 되었는데, 1장 18절과는 달리 바나바와 함께 헬라인이었던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디도를 동행케 한 이유를 2절과 3절 그리고 사도행전 15장 1절 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이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가르침이 변질된 복음임을 항변하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자주 왕래를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바울의 사역은 독립적이였다는 반증이고, 이와 같은 그의 처신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나 그의 사도직이 결코 예루살렘에서 비롯되거나 오지 않았다는데 있다. 1장 1절에 선언한 바와 같이 그의 복음도, 그의 사도직도 사람들이나 예루살렘 총회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 그러한 이유로 바울의 복음 또한 독립적인 복음이다.

 

    2:2  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지에 대한 설명 부분인데, 목적은 단 한가지로, 바울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과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예루살렘에 보고 또는 전하기 위함이었다.

 

    보다 더 정확한 이유는 사도행전 15장 1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볼 때, 교회 안에서 논쟁이 되었던 복음(바울 자신이 전한)과 할례 관계에 대해 "유명한 자들-seemed to be leaders"(probably 유대 제자들)에게 해명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한 자신의 사역이 헛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즉 구원은 오직 믿음이지 할례가 아니라는 바울의 복음 신앙이다. 이 말씀을 통해 또한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바울과 그 일행이 참석한 이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 대한 할례 문제가 주 의제였음을 알 수 있다.

 

    3:3  "그러나(αλλα'but'-strong emphasis)" 로 시작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의 단호한 태도를 나타내 주고 있는 단어(αλλα)선택인데, 비록 자신이 율법이나 할례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고 왜 복음의 순수성만을 강조했었는지를 변명하는 처지였으나, 그의 태도는 분명했다. "그래서" "αλλα" 즉 설사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해 바울 자신이 변명하는 위치에 섰다 할지라도 함께 동행케 했던 헬라인 디도에게 조차 할례를 강요하지 않은 것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라는 변할 수 없는 그의 신앙관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사도행전 15장 11절 말씀에서 베드로가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는 말씀으로 종결 되었다.

 

    2:4  "이는"(because of) 3절에 대한 해명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이 왜 디도로 하여금 할례를 받으라고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음을 이야기 한다. 즉, 만일 바울이 여기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치거나 억지로라도 행하게 했다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무어라고 했을까? 그것이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 신앙과도 맞지 않는 변질 또는 다른 복음이다.

 

    바울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강조를 둔 것은 (1)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고, (2)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에게 논쟁거리를 주지 않기 위함에서였다. 만일 바울 자신 조차 할례나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쳤다면 이방인들로서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복음이 결국 이방인들에게는 은혜가 아니라 저주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자유" in Christ
    (1)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2)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

    κατα δουλωσουσιν(3인칭,복수,미래,직설법,능동태-δουλοs-노예)
    in order to bring down us into bondage(NIV, NASB, RSV)
    "우리를 종으로"  (1) slave   (2) servant

 

    2:5  "일시라도"(a moment) 거짓 형제들에게 어떠한 틈도 주지 않았다. 오직 복음만을 바울은 고수하고 강조했을 뿐이지 잠시 편하자고 불법과 타협하는 것은 바울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so that) 바울이 이처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과 타협하지 않은 것은 "너희" 즉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 순수하게 보존되어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즉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always) 있게"하려 함에서였다.

 

    무엇이 "복음의 진리"인가?
    (1)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되심         (2)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심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5)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주가 되심

 

2:6-10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정당성(완벽한 이야기체)
    2:6  "유명하다는 이들" seemed to be important  (2절에서는 seemed to be leaders), 직역을 하자면, "중요하게 보이는 이들"이 그들의 신분이 무엇이든 바울 자신에게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하나님은 외모로(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 "유명하다고 하는 이들"이 바울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더해준 것은 없다 한다.

 

    설사 "유명하다는 이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영향력 있는 자리에 놓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말이 만일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거리가 멀다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외모"에 대한 언급으로 봐서 필경 바울의 외소하고 못난 외모를 사람들이 무시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하기에 강조하기를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생긴 외모를 보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2:7  "도리어" 오히려, 즉 그 유명하다는 이들이 무슨 말로 바울과 논쟁을 벌인다 할지라도 그들은 바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는데, "오히려" 마치 베드로가 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명을 받은 것처럼, 그들이 비난하던 바울이 무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할 사명 받았음을 "그들이"(they saw) 보았다고 바울은 말한다. 따라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그 유명하다는 이들" 이 보고 증거한 그 자체가 바울의 사명이 곧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임을 입증한 셈이 되었다.

 

    2:8  그렇다면 누가 바울에게 그런 사명을 주신 것이라고 그 유명한 자들이 깨닫고 있는 것일까? For God(NIV, For He-NASB, for he-RSV, 헬 Ο), 하나님이시다. "그 분" 즉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할례자(유대인들)들에게 복음 전할 사도직분을 주신것처럼, 자신(바울)도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무할례자(이방인들)들에게 복음 전할 사도직분을 주셨다고 한다. 따라서 분명해 진것은 그의 사도직은 (1) not from men, (2) not from Jerusalem, (3) but from the God.

 

    2:9  이 말씀은 재 번역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듯 한데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께서 내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나와 바나바에게 거리낌이 없는 교제를 청하였고 자신들은 유대인들에게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갈 것을 동의 하였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알고 동의했는데, 소위 유명하다는 너희들은 무엇을 가지고 논쟁하느냐는 반박이다.

 

    2:10  다만 그 세 사람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이나 할례에 관련된 일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기억(돌아보라)하라는 당부였다. 복음 안에서의 교회는 사랑이다. 따라서 교회는 (1) 돕는 곳이며, (2) 사랑이 넘치는 곳이고, (3)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하는 곳이며, (4) 기쁨이 충만한 곳이고, (5) 자유가 있고 누리는 곳이다. 바울 자신도 구제사업에 힘썼다고 한다.

 

결론:
    1) 바울의 복음은 계시에 의한 복음이다.
    2)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복음이다.
    3) 자신의 사도직과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함의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4) 우리가 서로 힘쓸바는 헛된 말로 논쟁을 벌이고, 복음을 변질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복음만을 전하며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고 돌보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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