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말씀과 생활

갈라디아서 강해7

관리자 2017.09.23 15:17 조회 수 : 56

Add movie file / 동영상 추가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3:6-14     

 

    지난 시간에 배운 말씀 중에서 주된 내용은 성령을 받을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결코 율법이나 다른 어떤 행위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데 있었다. 그러면서 5절에서 바울은 "우리 속에서 능력을 행하시고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냐 아니면 듣고 믿는 믿음을 통해서냐"는 반복된 질문으로 믿음의 확실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3:6-9  "아브라함의 자녀"
    3:6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답변을 과거 조상 아브라함이 어떠했었는지를 상기 시켜 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칭하시게 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율법은 이 약속이 있은지 430년 후에 주어졌다. 3:17)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믿은 것은 아들을 주어 그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같이 되게 하리라 하신 말씀인데, 14절 말씀을 보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겠다 하신 약속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아브라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직 믿음을 통해서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이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

 

    3:7 이와 같이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것처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된다. 이같은 바울의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 날 벼락 같은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해 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선민이고, 족보고 다 필요없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자유인이든 종의 신분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가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언이니 유대인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 세리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 임이로다"(눅19:9) 말씀 하신바 있다.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믿음을 보시고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은 다르다. 이같은 결과로 우리 또한 이제는 이방 죄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됐다. 이 말씀은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으니 율법의 행위나 의식에 치중하고 믿음을 업신 여기는 자들은 자연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없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3:8 이 말씀은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만세전부터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의로워 지고 구원 받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복된 소식을 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을 인하여 이방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왜 이방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되나? 만일 아브라함이 율법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이것은 이방인에게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된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고,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만일 아브라함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소망이 없다. 그러나 6절 말씀이 지적해 주고 있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칭해 주셨으니, 이방인들에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이 점 때문이다. 즉, 우리 또한 믿음으로 의로워 질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큰 복된 소식인가?

 

    아브라함이 소유한 믿음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 창세기 12장 1-4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의 행동이 소개되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75세 되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본토 아비집을 떠났다. 75세의 나이라면 고령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이유도, 의문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말씀대로 순종했다. 위대한 신앙의 결단이요 행동이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순종하여 떠났기 때문에 창세기 12장 2-3절 말씀의 축복이 임하게 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누릴 축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셨고, 이 축복권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상속되었다(창세기 25:11 -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창세기 27:29 - 이삭이 그 아들 야곱을 축복하는데 그 축복 내용은 창세기 12장 2-3절에 있는 말씀과 일반이었다. 즉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으니 우리 또한 축복의 후손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둘째, 창세기 15:5-6절 말씀인데, 자손에 관한 약속을 믿은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년까지 자식이 없어 자신의 상속자로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지목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난 자가 너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믿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 그런데 창세기 17장 1절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해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 나셔서 자손에 관한 약속을 재 확인하시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곧 자녀에 대한 약속을 주신 후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 하신 약속을 잊지 않고 믿고 기다렸다는 의미다. 창세기 18장 11절 말씀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 졌다고 했는데, 이와 같이 인간적인 생각이나 신체적인 조건을 보더라도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아브라함에게 아이가 있을 거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조건이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인간의 조건이나 환경상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하시겠다 하시니 하실줄로 믿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이다.

 

    3:9 그러므로 바울은 마침표를 찍는다. 이와같이 조상 아브라함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믿음으로 말미암은(믿음을 가진, 또는 소유한) 자들만이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 수 있고, 7절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여기서 바울은 사생결단의 결론을 내린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게 되었으니 믿음을 소유함으로 이 축복속에 거하겠느냐 아니면 할례와 율법과 절기 지키는 것을 고집함으로 실질적인 이방인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선택할 시간이 왔다. 믿음이냐 아니면 율법이냐,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율법만 주장하고 어떤 형식만 주장할 것이냐 아니면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믿음 안으로 들어 올 것이냐, 이것은 각자 개인이 내려야 할 결단이다.

 

3:10-14  "율법의 저주"
    10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은 6-9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6-9절까지의 말씀은 믿음을 통한 아브라함의 자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10-14절까지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저주의 자녀에 대해서 기록해 놓고 있다.

 

    3:10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모두가 다 저주아래 있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그 다음 말들이 그 첫번째 이유로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율법책에 기록된 내용 어느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율법 전체를 범하게 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서 구원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명기 27장 26절 말씀을 보자. 신명기 27장의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들에게 명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26절에서 모세가 지적하고 있는 27장 전체의 모든 율법을 실행하라고 했고, 만일 실행치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했다. 과연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 율법대로 다 준행하였는가? 율법을 지킨다 안지킨다를 논하기 전에 왜 하나님께서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유는 간단한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 생활을 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며 죄를 일삼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까지 만들어 숭배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만들어 자신들이 행하는 것이 죄인줄 알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기를 바라셨다. 율법은 죄를 판단하는 기준이지 구원의 방편은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죄인줄 알고도 행하면 그 행하는 자들이 죽게 되었으니 율법이 이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될 수 밖에 없다.

 

    3:11 10절에서 왜 율법의 행위에 속해있는 자들이 저주 아래 있는지에 대한 두번째 설명이다. 즉, 어느 누구든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는가?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칭함을 받는 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으니 이 말씀은 곧 믿음과 의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 질 수 있으므로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당연한것 아니겠는가?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무슨 의미일까?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The Law is not based on faith"(NIV) 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율법은 믿음을 기초로 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에는 오직 "행함"만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율법은 믿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행하기 위해서 또는 지켜지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데,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히 해 주는데 율법은 믿기만 해서는 우리가 살 수 없고, 오직 행동이 동반되 주어진 율법대로 지키고 행해야만 그 행함을 통해서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 인간은 그 율법을 100% 완벽하게 이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다는데있다. 레위기 18장 5절 말씀에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그 행위로 인하여) 살리라"고 했다. 여기서 "행하면"이라는 말이 "obey"(NIV)로 번역되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누구든지 율법에 기록된대로 "순종"하면 그 순종하는 행위를 인하여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결론은 율법을 통해서는 살 수 없고 결국 구원함을 받을 수 없다.

 

    3:13 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나? 구약 시대에는 만일 사람이 죄를 범하면 대속제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대속 제물이 되 주셨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고, 율법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게 됐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다. 신명기 21장 22-23절 말씀을 보면 죽을 죄를 범한 사람은 죽여서 나무에 매달라고 했는데 그 나무에 달린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 30절에 보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 두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명기에서 죽을 죄를 지은 자는 나무에 달아 죽이라 했고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으로 저주받을 죽을 죄인이셨다는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흠과 티가 없으시다. 그러나 죽을 죄인이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속죄양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나무의 저주 즉 죽음의 저주로 부터 구원해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아래 있는 죄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따라서 이제와서 율법을 운운하며 율법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구원함을 얻을 수 없다는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율법아래 종노릇하게 하는 올무일 수 밖에 없다.

 

    사도행전 5장 30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증명하신 것이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살리셨다는 것은 그분의 의를 증명하셨다는 역설이 된다. 그러므로 "의"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몸소 체험하신 것은 율법의 저주로 부터 해방 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갈라디아 성도들은 깨달아야 한다.

 

    3:14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저주의 형벌을 받으시게 된 이유를 이 말씀을 통해 해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하기 위함이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εν Χριστω Ιησου"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εν" 은 크게 세 가지로 해석 되어질 수 있다. 1) 안에서(locative), 2) 의하여 또는 3) 통하여(instrument) 그런데 그 중에서 영어 성경은 (NIV) "통하여"로 번역해 놓았고, 우리 말 성경은 "안에서"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원 바울의 의도에 더 가깝다. (만일 "εν"이 instrument로 사용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이나 축복의 도구로 이해하게 되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고 구원함을 얻을 수 있지만 이것은 오히려 분리 되어진 즉, 제 3자에 의한 중계에 의해 우리가 그러한 혜택을 입게 되는 인상을 주기 때문인 반면, "안에서"라는 해석은 한 지체를 의미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각 지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인것처럼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특권을 부여 받게 됨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이 곧 우리의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통해서 δια  τηs  πιστεωs)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우리"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가리키고 있는데, "δια"(ablative of means)는 "말미암아" 보다는 "의해서" 또는 "통해서" 즉 "믿음에 의해서 또는 믿음을 통해서"가 더 타당한 번역이 된다. 그 이유는 "δια" 라는 단어가 여기서는 "말미암아"라는 이유 보다는 "통해서"라는 수단이나 방법적인 의미를 더욱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약속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2장 33절과 이사야서 32장 15절의 말씀을 비교해 볼 때 이것은 성령의 임재, 성령강림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요한복음 14장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의미한다. 문법적으로 설명을 하면 "την επαγγελιαν (what was promised) του πνευματοs" 를 genitive of apposition or explanation or definition 이라고 하는데, 곧 소유격에 대한 설명이나 정의라는 뜻으로 이것을 다시 번역한다면 "약속 되어진 성령" 또는 "성령에 관계한(대한) 주어진 약속" 이라는 번역이 가장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신 이유는 약속 되어진 성령 즉 성령임재, 성령받음, 성령세례를 믿음으로(믿음에 의해서 또는 믿음을 통해서-by faith) 우리(이방인 유대인 모두 포함)가 받게 하기 위함이다.

 

결론:
    1.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있고 또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는데 그 이유는 율법의 저주 아래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우리게 상속되게 하기 위함이며,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번호 제목 날짜
25 갈라디아서 강해8 2017.10.14
» 갈라디아서 강해7 2017.09.23
23 갈라디아서 강해6 2017.09.16
22 갈라디아서 강해5 2017.08.26
21 갈라디아서 강해4 2017.08.19
20 갈라디아서 강해3 2017.08.12
19 갈라디아서 강해2 2017.08.05
18 갈라디아서 강해1 2017.07.29
17 히브리서 강해 1 2017.02.15
16 히브리서 강해 2 2017.02.15
15 히브리서 강해 3 2017.02.15
14 히브리서 강해 4 2017.02.15
13 히브리서 강해 5 2017.02.15
12 히브리서 강해 6 2017.02.15
11 히브리서 강해 7 2017.02.15
10 히브리서 강해 8 2017.02.15
9 히브리서 강해 9 2017.02.15
8 히브리서 강해 10 2017.02.15
7 히브리서 강해 11 2017.02.15
6 히브리서 강해 12 2017.02.15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