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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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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여호수아 2:15-24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에 앞서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안의 사정을 살피기 위해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그 와중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탐꾼들이 여리고성에 살고 있던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게 된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라합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 정탐꾼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그의 생명뿐 아니라 그의 가족의 생명까지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라합의 도움을 받아 가나안 땅을 무사히 탐지하게 된 정탐꾼들은 여리고성을 떠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으로 쳐들어 올 때에 창문에 붉은 줄을 걸어 놓으면 너희 가정은 이것을 표시로 해서 살리라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에 따라서 라합은 그대로 이행하게 되었고, 그 정복 전쟁 가운데서도 오직 라합의 식구들만큼은 구원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서 떠난 후 기생 라합이 창문에 맨 붉은 줄은 영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뜻을 주고 있는가?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상고해 봄으로서 은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이것은 약속의 표였습니다(17절).
    붉은 줄을 표시로 해서 기생 라합과 그의 가정을 살려 주겠다고 하는 약속의 표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을 기생 라합이 숨겨주고 편리를 제공하며 협조해 준 값으로, 여리고성이 이스라엘 군대로 인해 함락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전황 속에서도 창에 붉은 줄을 매어 둔 라합의 집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일단 라합의 집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든 상관하지 아니하고 살려 주었습니다. 이웃 사람이 되었든, 건너마을 사람이 되었든, 사람을 보고 살리고 죽였던 것이 아니라 붉은 줄의 약속의 표시에 따라서 그 안에 누가 있든 상관하지 아니하고 살려 주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불문하고 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즉 창에 매어 둔 붉은 줄이 약속의 표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의 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불문하고 모두가 다 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한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희생양의 피의 언약입니다. 희생당한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기만 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상관하지 아니하고 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설사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여 문설주에 희생양의 피를 바르지 아니한 사람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라합이 매어 놓은 붉은 줄의 언약은 마치 애굽에서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 내릴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면했던 것과 같은 약속의 표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을 죄인이 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 구원의 복이 있습니다. 축복의 복이 있습니다.

2. 이것은 믿음의 표시입니다(18절).
    본문에서의 믿음이란 참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와서는 믿음의 표시가 구체화 되었는데,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붉은 줄의 약속은 구원의 표식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내걸때 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라합은 생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다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에 대해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이것을 경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놓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 섬으로 새로운 믿음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모든 신들 위에 계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게 됐을 때, 그 믿음은 곧 사는 역사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의 일생 일대 삶의 전환점, 삶의 대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이 사건을 통해 말로만 들어오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지금까지 섬겨왔던 자기의 신을 버렸습니다. 자기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가 되었고, 이적 행위를 한 것이 되지만, 이제까지 섬기던 우상 신에서 참 하나님 편에 서게 되는 결단이 되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는 망하게 될 것이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과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는 한이 있어도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편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이 도우시는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이 미래를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는 믿음이요, 모험을 감행하는 믿음이요, 하나님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표시였습니다.

    사실 자기 백성을 버리고, 지금까지 섬겨 오던 우상을 버리고, 체험해 보지도 못했던 하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건 엄청난 모험이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고대 사회에서 자기 신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그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복이 있고, 영생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감히 라합은 그의 조상들이 섬겨 오던 신을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믿음을 결단코 소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라합과 같은 믿음으로 항상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활 속에 소망이 있고,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것은 구원의 표였습니다(19절).
    믿음에는 항상 구원이라는 보상이 있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겨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는데 구원에 대한 언약이요, 축복에 대한 언약이었습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매 그의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함을 받게 되었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으로 고생하던 병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으매 그 믿음으로 육신의 질병만 고침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은혜까지도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쳐들어왔을 때 라합과 그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합은 그저 겨우 살아 남았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 겨우 겨우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살아남았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방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라합이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엄연히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창문에 걸어 놓았던 붉은 줄은 구원의 표식입니다.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가정의 구원을 보장하게 된 표식이었고, 장차 그의 몸에서 태어날 후손들에게까지 미치는 은혜의 표식이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하고 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갖가지 은총과 기쁨과 평강을 얻어 세상 재난을 면하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반열에서 참 생명과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라합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구원의 표식이 됐습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만인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은총의 표요, 구원의 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창문에 걸어둘 붉은 표식의 줄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표식은 우리 심령 속에 간직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의 표시로 구원받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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